‘근로자 추락사’ 인천항만공사, 1심 유죄→ 2심 무죄
대법, “실질적 지배ㆍ관리 권한이 판단 기준”… 파기환송
[대한경제=이승윤 기자] 공사 발주자가 산업안전보건법상 하청업체 근로자에 대한 안전보건 조치의무를 위반하면 처벌되는 ‘도급인’에 해당하는지 여부는 ‘산업재해 유해ㆍ위험요소에 대한 실질적인 지배ㆍ관리 권한’을 기준으로 판단해야 한다는 첫 대법원 판결이 나왔다.
법조계에서는 중대재해처벌법 시행 이후 산재 발생 시 엄벌 기조가 이어지는 상황에서 건설공사를 도급한 사업주의 안전관리 책임이 대폭 확대됐다는 평가가 나온다.
서초동 대법원 청사/ 사진: 대법원 제공 |
18일 법조계에 따르면 대법원 2부(주심 오경미 대법관)는 산업안전보건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인천항만공사(IPA)와 최준욱 전 사장의 상고심에서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유죄 취지로 파기하고 사건을 인천지법으로 돌려보냈다.
2020년 6월 인천항 갑문에서는 IPA가 발주한 수리공사를 하던 하청업체 근로자가 18m 아래 바닥으로 추락해 숨지는 사고가 발생했다. 최 전 사장이 취임한지 세 달도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검찰은 IPA가 사실상 원청에 해당한다고 보고, 안전대 부착설비 설치 등 안전조치를 하지 않아 근로자를 숨지게 한 혐의로 최 전 사장 등을 재판에 넘겼다.
재판 과정에서는 IPA가 산업안전보건법상 도급인인지, 건설공사발주자인지 여부가 쟁점이 됐다.
‘건설공사발주자’는 건설공사를 도급했더라도 시공을 주도해 총괄ㆍ관리하지 않는 경우로, 법 개정 과정에서 도급인에 대한 형사처벌을 강화하면서 도입된 개념이다.
현행법상 도급인은 하청업체 근로자에 대한 안전보건 조치의무를 부담하고, 이를 위반해 근로자가 사망한 경우 7년 이하의 징역이나 1억원 이하의 벌금형으로 처벌된다.
반면 건설공사발주자는 산재 예방 조치의무를 부담하지만 이를 위반하더라도 과태료 부과 대상일 뿐, 도급인과 달리 하청업체 근로자에 대한 안전보건 조치의무는 지지 않는다.
IPA 측은 자신들이 시공을 주도하거나 공사를 총괄ㆍ관리하지 않았다며 “건설공사발주자에 해당돼 산업안전보건법 위반죄가 성립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1ㆍ2심의 판단은 엇갈렸다.
1심은 IPA가 산업안전보건법상 건설공사발주자가 아닌 ‘도급인’으로서 안전보건 조치의무를 져야 한다고 보고 벌금 1억원을 선고했다.
갑문 수리공사는 IPA의 핵심사업 중 하나일 뿐만 아니라, IPA의 인력과 자산 규모가 공사를 맡은 민간업체보다 월등히 우월한 만큼 IPA가 공사 시공을 총괄ㆍ관리하는 지위에 있었다는 이유였다. 최 전 사장도 징역 1년6개월의 실형 선고와 함께 법정 구속됐다.
게다가 IPA가 사고 발생 8일 전 재해예방 전문지도 기관으로부터 안전대 부착설비 미설치 등으로 인한 추락사고 발생 위험을 지적받았는데도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이미 2016년과 2017년에 갑문 수리공사 현장에서 2건의 근로자 추락 사망사고가 발생했다는 점도 양형에 반영됐다.
하지만 2심은 “IPA는 공사 시공을 총괄ㆍ관리하는 지위가 아닌 건설공사발주자였다”며 무죄로 판단을 뒤집었다.
IPA처럼 직접 시공을 수행할 자격이나 능력이 없어 건설공사를 도급할 수밖에 없는 경우에는 산업안전보건법상 건설공사발주자에 해당할 뿐, 공사 시공을 주도해 총괄ㆍ관리하는 도급인에는 해당하지 않는다는 게 2심의 판단이었다.
그러나 대법원은 “IPA는 건설공사 시공자격 보유 여부와 관계없이 갑문 정기보수공사의 시공을 주도해 총괄ㆍ관리하는 자로서, 단순한 건설공사발주자를 넘어 수급 사업주와 동일한 안전보건 조치의무를 중첩적으로 부담하는 산업안전보건법상 도급인에 해당한다”며 다시 2심의 판단을 뒤집었다.
산업안전보건법상 형사책임을 지는 도급인에 해당하는지 여부는 산업재해 유해ㆍ위험요소에 대한 실질적인 지배ㆍ관리 권한을 기준으로 해당 공사에 대한 실질적인 영향력과 전문성, 시공능력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규범적인 관점에서 판단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감안하면 IPA가 산재 유해ㆍ위험 요소에 대해 실질적인 지배ㆍ관리 권한을 갖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높은 전문성을 지닌 도급 사업주로서 수급인에게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봐야 한다는 게 대법원의 판단이다.
항만 핵심시설인 갑문 유지ㆍ관리는 IPA의 주된 설립 목적 중 하나로 IPA가 보수공사 전 과정을 기획하고 설계도면을 직접 작성했을 뿐만 아니라 △철강구조물공사업 등록을 하지 않았지만 갑문시설의 유지ㆍ보수를 주 업무로 하는 전담부서를 두고 있었고 △IPA는 거대 공기업인 반면 시공사는 자본금 10억원, 상시근로자 약 10명에 불과한 소규모 기업인 점 △위험성평가표에 사고 전부터 중량물 취급 관련 사고 위험이 지적된 점 등이 이 같은 판단의 근거가 됐다.
법조계에서는 건설공사를 도급한 사업주들이 건설공사발주자 지위를 인정받기 어려워진 만큼, 처음부터 도급인의 지위에서 하청업체 근로자에 대해 안전보건 조치의무를 적극적으로 지켜야 한다는 조언이 나온다.
법무법인 율촌 중대재해센터의 정대원 변호사는 “사업의 핵심시설에 대한 유지보수성 건설공사를 발주하는 경우 해당 공사를 직접 실행할 자격을 갖추지 못했더라도, 해당 시설과 장비, 장소 등을 실질적으로 지배ㆍ관리하는 주체로서 산재 유해ㆍ위험요소에 대해서도 지배ㆍ관리할 권한이 있다면 규범적 관점에서는 도급인으로서 안전보건 조치의무를 부담한다고 볼 가능성이 높다”고 설명했다.
이어 “사업 특성상 다양한 건설공사를 발주하는 경우, 건설공사들을 유형화하고 법적 지위에 맞는 안전보건 조치를 실시할 수 있도록 실질적 재해 예방뿐만 아니라 법적 책임에 대한 리스크도 낮출 수 있는 체계를 마련해 두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조언했다.
법무법인 태평양 중대재해대응본부의 송진욱 변호사도 “국내 공항, 항만, 도로, 교량, 철도, 발전 등 사회간접자본의 운영주체인 공기업들은 누구보다 높은 수준의 전문성을 갖추고 있어 유지ㆍ보수를 위한 건설공사에서도 전문성과 시공능력을 고려할 때 실질적인 영향력이 매우 크다고 인정될 가능성이 있다”며 “건설공사발주자 지위를 인정받기 어려운 경우도 있을 수 있다”고 내다봤다.
그는 “에너지, 정유, 통신 등 기간산업이나 자체적인 유지ㆍ보수 업무가 수반되는 대규모 시설ㆍ설비 운영이 불가피한 사업주도 산재 유해ㆍ위험 요소에 대한 실질적인 지배ㆍ관리 권한을 갖고 있는 것으로 인정될 가능성이 있다는 점을 유의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이승윤 기자 lees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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