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가평 작업실에서 부랴부라 짐을 싸들고 양평 서종에 똬리를 튼 게 2018년 이었다. 뭔가 스스로를 혁신해야한다는 당찬 도전의 출구였다. 어쩌면 불심이 두터운 모친이 병약한 아들을 살리려 이산 저산 공양을 드렸던 절박한 심정이 그러했을 것이다.
작업실을 옮긴 첫날 저 멀리 청평호수의 찰랑거리는 물빛이 야트막한 산턱까지 휩쓸었다. 쏟아지는 밤빛의 기세도 좋았다. 작업실 구석 구석까지 짙은 고요가 파고들었다. 학생을 가르치며 평생 화가로 살아온 부침의 세월이 마치 무거운 고독의 아우라처럼 이랬다.
경기도 양평 서종 작업실에서 자신의 작품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이석주 화백. 사진=김경갑 기자 |
국내 화단의 간판급 극사실주의(사진처럼 정교한 ‘눈속임 회화’) 화가 이석주(72)에게 그림은 인생의 파도를 견디게 해준 반려자 같은 존재다. 고비마다 그림 작업은 위안이 돼 주었다. 자신이 벼랑 끝에 섰을 때도 붓을 들고 갠버스 앞에 서면 모든 것들이 거짓말처럼 정리가 됐다.
그렇게 화업 반세기를 이어온 70대 초반의 그를 또 한번 전시장으로 불러냈다. 다음달 5일 시작해 내년 1월10일까지 서울 선능역 인근 아트큐브2R2갤러리에서 여는 개인전이다. ‘인 타임 스페이스(In time space)’란 무거운 주제를 걸고 서종에서 몸부림치며 작업한 미학 세계를 입체적으로 보여주는 자리다. 매일 10시간 넘게 작업실에 파묻혀 죽어라 그림에만 매달려 대차게 꾸린 10호 소품에서 300호에 달하는 근작 ‘사유적 공간’ 시리즈 30여점을 풀어놓는다.
사람들의 손때가 묻은 책이나 오래된 시계, 들판을 달리는 기차, 거침없이 뛰고픈 욕망을 간직한 말(馬) 등 시간의 흐름을 붓끝으로 잡아낸 작품들이다. “평범한 소재로 시공간을 넘나들며 아름다운 세계에 도달하고픈 열망을 많은 사람들과 따뜻한 커피를 마시듯 향기롭게 공유하고 싶다”는 작가의 말이 감질나다.
숙명여대에서 오랜시간 교편을 잡은 이 화백은 고영훈 지석철 주태석 김강용 씨와 함께 국내 극사실주의 1세대 화가 ‘5총사’로 꼽힌다. 단색조의 미니멀한 추상화가 국내외 화단에 들불처럼 유행하던 1970년대에 이 화백은 사진보다 더 실제 같은 극사실주의 작업에 뛰어들었다. 당시는 추상화를 하지 않으면 시대에 뒤떨어진 것으로 인식됐지만 그는 오히려 시대를 반영하지 못하고 현실과 동떨어진 추상화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의 작업은 미국의 하이퍼 리얼리즘과 동시에 출발했지만 한국 특유의 맛이 살아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최근에는 극사실 화법에 다양한 시간의 이미지를 응축한 ‘스토리텔링 회화’를 개척하고 있다.
이 화백은 화업 50년 내내 극사실주의라는 테두리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에 대해 부친의 삶과 연결됐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의 부친은 한국 현대연극의 선구자였던 이해랑 선생(1916~1989)이다. “아버님은 연극을 하면서 평생 ‘리얼리즘’이란 말을 입에 달고 사셨어요. 흘러간 과거를 통해 현재를 살려내야 한다는 말씀이 아직도 귓전에 맴돕니다. 현대미술은 개념적 경향이 강해 제게는 맞지 않는 것 같기도 하고요.”
이석주 화백의 '사유적 공간' 사진=아트큐브2R2갤러리 제공 |
실제로 그의 작품들은 고전 명화를 보는 듯 허공엔 스르르 ‘환영(illusion)’이 감지되고 시간의 흐름이 빼꼼히 고개를 내민다. 과거와 현재, 미래를 내달리며 ‘시간의 나이테’를 축성하는 이들 이미지는 언젠가는 꽃잎처럼 사라지고 마는 존재라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그래서 그의 그림 앞에선 그저 망연해진다. 화면에 존재하는 것은 분명 책과 시계, 말, 명화 ,기차 이미지일 뿐인데 알 수 없는 적막감과 실존적인 신비감이 우수수 따라온다. 작은 의자나 책 페이지들이 시계나 말 이미지와 연결되며 마치 새로운 시공간에 와 있는 듯한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이석주 화백의 '사유적 공간' 사진=아트큐브2R2갤러리 제공 |
이 화백은 평생 극사실 기법으로 이렇게 시간과 실존의 실체를 잡아내는 데 집착하고 있는 것이 궁금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시간을 시각화’하는 것이란 대답이 돌아왔다. “기억의 앙금들을 건져올려 과거와 현재, 미래를 교차시켜주는 게 핵심이죠. 시간의 축적을 관찰해 그림에 차곡차곡 담아내고 흡수시키는 일이 흥미로워요.”
실제로 시간(時間)은 사물의 변화를 인식하기 위한 개념이다. 보는 것과 아는 것이 한데 결합되어 나타난다. 그래서 시간은 1차원의 불가역성이 특징이지만 3차원의 공간과 불가분한 통일을 이룬다. 시간의 개념을 끌여들여 새로운 공간을 연출한 이 화백이 작품 제목을 ‘사유적 공간’으로 붙인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극사실적 기법으로 손살같이 흘러가는 시간을 잡아낸 ‘이석주 표’ 그림이 많은 미술애호가들에게 주목을 받는 이유는 뭘까. 가장 큰 요인은 딱딱하고 철학적인 개념인 ‘시간과 존재’을 감성적으로 터치하는 것이다. 첨단 산업사회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이 느끼는 시공간에 철학적 의미를 풍부한 감성의 나래로 그 밑뿌리로 어루만진다. “제 작업은 시공간을 접목하고 이를 두 세 개의 이미지로 승화시키는 것이지요. 소설이나 시처럼 참신한 스토리를 담아내려 노려 합니다.”
기법의 특이함도 미술 애호가들을 끌어들이는 또 다른 이유다. 바로 데페이즈망(depaysement·이질적인 대상의 결합)이다. 그의 작품에선 백마가 들판의 기차를 들여다 보거나, 구겨지고 낡은 책 옆에 네덜란드 화가 요하네스 베르메르의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 시계와 의자 이미지들을 묶어 놓음으로써 시각적 충격과 신비감을 자아낸다.
색채의 변화도 동반하고 있다. 유화 물감을 바른 뒤 매끈하게 처리한 바탕색의 표면이 한층 포근해졌다. 이전의 작가가 고뇌하는 사색가였다면 이제는 자연과 인생을 노래하는 뮤지션 같은 아티스트의 모습이다.
한평생을 미술 연구와 그림 작업에 바친 그의 열정, 집념 또한 관람객에게 깊은 감동을 준다. 이 화백은 “미술가로서의 내 삶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 건 부모님”이라면서 “붓끝에서 나오는 마술같은 감흥에 큰 충격을 받아 그림을 시작했고, 오늘의 저를 일구는 토대가 됐다”고 회고했다.
김경갑 기자 kkk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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