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바로가기
[권혁식의 정치 클릭] 12ㆍ3 비상계엄, 무엇을 겨냥하고 있었나
페이스북 트위터 네이버
기사입력 2025-02-17 11:52:32   폰트크기 변경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13일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대심판정에서 열린 윤석열 대통령 탄핵심판 8차 변론기일에 출석해 있다. /사진:연합뉴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지금까지 비상계엄이 스무번 가까이 선포됐지만 헌법 규정 대로 ‘국가비상사태’ 대응책으로 발동된 경우는 소수에 불과하다. 여수순천사건, 제주4ㆍ3사건, 6ㆍ25전쟁 때가 그 경우라고 할 만하다. 반면에 군을 동원해 국회 등을 무력화하겠다는 국내 정치용으로 계엄을 선포한 경우도 적지 않다. 5ㆍ16군사정변, 10월 유신, 5ㆍ17쿠데타 때가 대표적 사례다. 뒤이어 국회를 대신하는 초헌법적인 기구가 등장해 개헌 작업을 마친 뒤 새 헌법에 따라 대선과 총선이 실시되는 순으로 전개되곤 했다. 계엄, 개헌, 대선, 총선 등 4종이 한 세트였던 것이다.


1961년 5ㆍ16 군사정변 때 군부는 쿠데타 당일 민주당 정부를 압박해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일체의 정치 활동을 금지하고 ‘국가재건최고회의’라는 초헌법적 입법기구를 만들어 개헌 작업에 착수했다. 제2공화국의 내각제를 대통령중심제로 전환하고 4년 중임제와 국회 단원제 등을 골자로 하는 제5차 개헌안을 1962년 12월26일 공포해 제3공화국 출범 정지작업을 끝냈다. 이후 1963년 10월15일 대선을 실시해 민주공화당 박정희 후보가 민정당 윤보선 후보를 15만여표 차로 꺾고 제5대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한 달 뒤인 11월26일 제6대 총선에선 여당인 민주공화당이 과반의석을 차지해 ‘여대야소’ 국회를 개막했다.


10월 유신 때도 비슷한 흐름을 보였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1972년 10월17일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포고령을 통해 국회를 해산하고 모든 정치활동을 금지시켰다. 국회 대신에 ‘비상국무회의’를 내세워 개헌작업에 착수했다. 앞서 여당인 민주공화당이 1971년 5월 8대 총선에서 113석을 얻어 국회 과반의석을 차지하고 있었지만, 박 대통령은 여당을 외면했다. 여당 의석수가 개헌정족수에 미달하는 데다 차기주자인 김종필 계의 반발을 의식해 국회를 통째로 포기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8대 국회는 4년 임기의 절반도 못 채우고 단명했다. 대통령 직선제 폐지 및 통일주체국민회의를 통한 간선제, 연임 제한 조항 삭제(종신 집권 가능), 국회 해산권, 유신정우회 등을 골자로 하는 제7차 개헌안(유신헌법)이 1972년 12월27일 공포됐다. 사흘 전인 12월23일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들은 장충체육관에서 단독 입후보한 민주공화당 박정희 후보를 제8대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이듬해인 1973년 2월27일 제9대 총선을 실시한 결과 민주공화당 73석, 유신정우회 73석으로 여당이 개헌 정족수를 확보했다.


5공화국을 탄생시킨 5ㆍ17쿠데타 때도 같은 공식이 적용됐다. 신군부세력은 1980년 5월17일 공포 분위기 속에서 국무회의를 개최해 ‘비상계엄 전국 확대’를 의결토록 한 뒤 계엄포고령을 통해 정당 및 정치 활동을 중지시키고 병력을 동원해 국회를 봉쇄했다. 5ㆍ18 민주화운동 유혈 진압 뒤인 5월31일 ‘국가보위비상대책위’를 설치해 개헌 작업에 착수했다. 대통령선거인단에 의한 대통령 간선제, 7년 단임제, 국회해산권 등을 골자로 한 제8차 개헌안을 1980년 10월27일 공포했다. 이듬해인 1981년 2월 25일 대통령 선거인단은 민주정의당 전두환 후보를 제12대 대통령으로 선출했고 한 달 뒤인 3월 25일 11대 총선에선 민주정의당이 151석으로 과반을 차지했다.


1981년 1월 비상계엄 해제 이후 43년만인 2024년 12월3일 비상계엄이 다시 역사의 전면에 등장했다. 윤석열 대통령은 이날 오후 10시 23분경 “종북과 반국가세력을 척결하고 자유대한민국을 수호하겠다”는 명분으로 전국 단위의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포고령을 통해 ‘국회 및 정당의 정치활동 일체 금지’를 발표하고 계엄군에 의한 국회 장악을 시도하는 등 역대 성공사례를 좇아가는 듯했다. 그러나 거대 야당 주도로 비상계엄 해제 요구안이 국회를 통과하는 미증유의 맞대응으로 비상계엄은 약 6시간 만에 종료됐다.


이후 윤 대통령이 내란 우두머리 혐의에 대한 공수처 수사를 거부하고 “야당 경고용”이었다고 뒷걸음질치는 바람에 당초 계엄 로드맵이 어디까지 그려져 있었는지, 현재로선 세간의 궁금증만 더할 뿐이다. 그럼에도 국회를 장악하려 한 데다 ‘국가비상입법기구 쪽지’가 발견되고 정치인을 포함한 각계 인사 무더기 체포 계획이 담긴 ‘노상원 수첩’이 나온 점 등에서 이번 계엄도 개헌을 거쳐 대선, 총선에 이르기까지 풀코스를 염두에 뒀을 것이란 추론이 가능하다.


윤 대통령은 거야가 장악한 국회가 탄핵을 남발하고 입법폭주를 일삼는 등 국정을 마비시키는 요인이라는 인식이 강한 데다 야당에 이미 적의를 드러낸 이상 그 국회가 다시 열리도록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호랑이 등에 올라탄 이상 그냥 내려올 수 없는 사정과 마찬가지다. 때문에 비상입법기구가 주도하는 개헌을 통해 22대 국회를 단명시키고 조기 총선으로 새 국회를 출범시켜야 하는 필요성에 직면했을 수도 있다. 여기다 국민 지지 여론이 높은 ‘대통령 4년 중임제’까지 개헌 목록에 포함시킨다면 조기대선으로 갈 수도 있을 것이다. 

헌법에 규정된 대통령의 계엄 선포권은 1948년 제헌헌법 때부터 들어 있었지만, 국회에 의한 계엄 해제 요구권은 당초 계엄법에 있다가 제3공화국 출범을 앞둔 1962년 12월 제5차 개헌 때 처음으로 헌법에 신설됐다. 아무튼 계엄 해제요구권은 선포권과 늘 함께 존재했지만 과거 계엄에선 야당에 의해 빛을 발하지 못했다. 10월 유신 때처럼 여대야소 국회에선 야당이 처음부터 엄두를 못 냈을 수도 있지만 5ㆍ17 때는 사정이 달랐다. ‘서울의 봄’을 맞아 ‘3김(YS, DJ, JP)’을 비롯한 여야 정치인들이 차기 대선을 향해 움직이면서 신군부의 동향을 예의주시했는데도 이 조항을 활용하지 못했다. 그만큼 계엄 선포 뒤 정치인 구금과 정치활동 봉쇄가 전격적이고도 치밀하게 이뤄졌다는 방증이다.

그에 비하면 12ㆍ3 계엄에선 윤 대통령과 김용현 전 국방장관 등 주동세력이 군을 효과적으로 지휘하지 못한 게 결정적인 ‘패인’으로 보인다. 5ㆍ16, 10월 유신, 5ㆍ17 등에선 모두 군을 잘 아는 군부 또는 군 출신 대통령이 군을 움직였기 때문에 차질없이 정치권을 제압할 수 있었지만 특정고교 동문들로 뭉친 이번 계엄 지휘부는 곳곳에서 허점을 드러냈다. 여기다 야당의 적극적인 저지 행동과 상당수 계엄군의 적법하지 않다는 자각도 계엄 조기 종료에 한몫했다.


김 전 장관은 지난해 9월 본인의 인사청문회에서 야당 의원들이 계엄준비설을 추궁하자 “지금 우리 대한민국 상황에서 계엄을 한다면 어떤 국민이 과연 용납하겠습니까. 우리 군도 따르겠습니까? 저는 솔직히 안 따를 것 같아요”라고 답했다. 당시 이 발언이 진정성을 담고 있었다면 지금 같은 영어(囹圄)의 신세는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권혁식 논설위원 kwonhs@

〈ⓒ 대한경제신문(www.dnews.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 구글 플레이스토어에서 '대한경제i' 앱을 다운받으시면
     - 종이신문을 스마트폰과 PC로보실 수 있습니다.
     - 명품 컨텐츠가 '내손안에' 대한경제i
법률라운지
사회
로딩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