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제1세대 전위 예술가이자 실험미술의 선구자 김구림은 회화, 판화, 설치미술 비롯해 한국 최초의 일렉트릭 아트, 메일아트, 실험영화, 대지미술 등 장르의 경계를 넘나들며, 무려 70여 년 한국의 아방가르드 예술의 선구자로 총체적 예술을 굵직하게 선보여 왔다. 한국아방가르드협회(AG)(1969), ‘제4집단(1970)’ 등을 결성한 그는 1981년 동판화 메조틴트 기법을 국내에 처음 선보이는 등 국내 판화 역사에도 한 획을 그었다. 1992년 백남준과 2인전을 개최해 한국 미술계와 전위예술사에 큰 족적을 남기며 K-아트의 위상을 드높여 왔다.
◆세계무대를 뛰는 억척 미술가
‘전위 예술전사‘ 김구림을 비롯해 이건용 한만영 김강용 이희돈 고영훈 이석주 강형구 이목을 이이남 고상우 등 한국 현대미술의 거장들이 함께 뭉쳤다. 오는 22일 개막해 6월 28일까지 서울 용산구 모다갤러리에서 이어지는 한국 현대미술 거장전 ‘어게인 레전드 어게인’을 통해서다.
국내 미술시장이 조정을 받는 가운데 우리 민족의 보편적 정서를 독특한 예술세계로 승화시킨 대가들의 미의식을 재조명한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작가들이 직접 보내온 근작들은 물론 미술 애호가들이 소장하고 있는 작품 50여 점이 걸린다.
대중들에게 강렬한 카리스마와 깊이 있는 연기로 사랑받아 온 배우 전광렬 모다갤러리 대표는 “최근 한국미술이 글로벌 시장에서 대접을 받지 못하면서 기성 작가조차 의욕을 잃고 작업을 기피하고 있다”며 “그 원인을 찾고 해결 방안을 모색하기 위한 전시회”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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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돈 화백의 '인연' 사진=머다갤러리 제공 |
◆1.5세대 간판급 단색화가 이희돈
작가들은 얄팍한 트렌드에 의지하기보다 끊임없는 도전정신과 자기성찰, 혁신적 시도에 독창성까지 가미한 작품을 들고 나온다.
K-화단의 간판급 단색화가 이희돈은 붓끝으로 세상을 깨운 ‘인연’시리즈 5~6점을 건다. 화려한 단색조의 직물이 펼쳐져 있거나 나무뿌리가 뻗어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자아내는 작품이다. 골판지 위에 그물망이나 스테인리스 망을 격자형으로 배열하고 20~30차례 반복적으로 물감을 올려 작업한 단색화의 특징들이 잘 드러나 있다.
이 화백은 1980년대 후반 골판지에 작은 구멍을 촘촘하게 뚫는 타공 기법에 착안해 이를 자신의 조형 언어로 채택했다. 닥나무를 빻아 만든 한지에 아크릴 물감을 발라 입체감을 만들어내는 독특한 단색화 영역을 개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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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석주 화백의 '사유의 공간' 사진=모다갤러리 제공 |
◆K-극사실주의 작가 총출동
이석주 고영훈 김강용 등 국내 화단의 간판급 극사실주의(사진처럼 정교한 ‘눈속임 회화’) 화가들의 작품도 놓칠 수없다. 이들은 국내 극사실주의 1세대 화가 ‘3총사’로 불린다. 미니멀한 추상화가 국내외 화단에 들불처럼 유행하던 1970년대에 이들은 사진보다 더 실제 같은 극사실주의 작업에 뛰어들었다. 당시는 추상화를 하지 않으면 시대에 뒤떨어진 것으로 인식됐지만 그는 오히려 시대를 반영하지 못하고 현실과 동떨어진 추상화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들의 작업은 미국의 하이퍼 리얼리즘과 동시에 출발했지만 한국 특유의 맛이 살아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먼저 이석주 화백은 사람들의 손때가 묻은 책이나 거침없이 뛰고픈 욕망을 간직한 말(馬), 명화에 등장한 인물 등 시간의 흐름을 붓끝으로 잡아낸 작품을 펼쳐 보인다. 평범한 소재로 시공간을 넘나들며 아름다운 세계에 도달하고픈 열망을 담아낸 수작들이다. 실제로 그의 작품들은 고전 명화를 보는 듯 허공엔 스르르 ‘환영(illusion)’이 감지되고 시간의 흐름이 빼꼼히 고개를 내민다. 과거와 현재, 미래를 내달리며 ‘시간의 나이테’를 축성하는 이들 이미지는 언젠가는 꽃잎처럼 사라지고 마는 존재라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고영훈 화백은 책에 돌멩이나 꽃을 얹어 궁금증을 불러일으키는 ‘데페이즈망’(사물을 다른 환경에 두는 것)기법을 채택한 작품, 사람들의 손때가 묻은 옛 도자기 그림까지 1970년대 이후 극사실의 좌표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않고 기계가 재현할 수 없는 감성적 느낌으로 공들인 작품들 들고 나온다. 실제로 그의 그림 앞에선 그저 망연해진다. 화면에 존재하는 것은 분명 책, 돌, 꽃, 백자 이미지일 뿐인데 알 수 없는 적막감과 실존적인 신비감이 우수수 따라온다.
1952년 제주에서 태어난 고 화백은 1974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앙데팡당(Indépendant)'전에 '이것은 돌입니다'를 출품해 국내 화단의 주목을 받았다. 1986년에는 한국인 화가 최초로 베니스비엔날레에 참가해 세계 미술계에 당당히 이름을 올렸다.
극사실적인 초상화로 유명한 작가 강형구의 작품도 나온다. ‘40대 늦깎이 화가’로 잘 알려진 강 화백은 그동안 링컨을 비롯해 트럼프, 빈센트 반 고흐, 오드리 헵번, 메릴린 먼로 등 시대의 아이콘으로 꼽히는 인물들의 얼굴을 알루미늄판 위에 에어브러시, 못, 드릴, 이쑤시개 등 날카로운 도구로 세밀하게 표현한 작업을 선보이곤 했다. 지금까지 발표된 작품에서 볼 수 없던 저변의 과정과 시대적 상황이 담긴 작품들을 통해 관람객의 시선을 끌어 모은다는 계산이다.
‘벽돌 화가’ 김강용의 작품도 고품격의 아우라를 뿜어낼 것으로 예상된다. 해변에서 직접 모래를 수집해 체로 걸러 캔버스에 펼친 다음 벽돌의 질감을 극사실적으로 묘사한 작품이다. 모래라는 실재와 그림자의 환영이 만들어낸 환상적인 벽돌이 마치 손에 잡힐 듯 불쑥 튀어나온 게 이채롭다.
극사실주의 화가 이목을 작품 역시 관람객의 시선을 붙잡을 예정이다. 한때 나무판을 캔버스 삼아 대추와 사과 등을 극사실적으로 그렸던 이 화백은 백자 그림 '점정(點睛)’을 내놓는다.
'점정‘시리즈는 극사실화를 추구하는 이 화백이 가장 잘 해낼 수 있는 묘사를 극도로 절제해 완성 시리즈들이다. 어린 시절에 한쪽 눈을 실명한 작가는 다른 쪽 눈 역시 시력이 떨어진 상황에서 보여지는 백자의 가장 도드라진 빛을 화폭에 담았다. 백자의 외형이 변하면 (보는 분들이) 의아해 할 수도 있고 받아들이기 어려울 수도 있겠지만, 또 다른 형상으로 진지하게 소통할 수 있는 작품이라는 게 작가의 설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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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만영 화백의 작품 사진=모다갤러리 제공 |
◆'K-팝아티스 원조' 한만영
팝아티스트 한만영 화백도 근작 네 점을 내놓는다. 한 화백은 1980년대부터 청색 바탕의 캔버스에 다양한 이미지를 그린 뒤 기계 부품, 거울, 전화기, TV, 바이올린 등과 같은 일상적인 오브제를 결합하는 작업을 꾸준히 해 왔다. 고대 로마 신전부터 르네상스 회화, 고구려 고분벽화, 불상, 조선 시대 진경산수화에 이르기까지 동서고금 미술품의 이미지를 빌려온 그의 작품은 극사실적이면서도 비현실적인 화면이 특징이다. 사각 캔버스에 명화 이미지를 부조처럼 배치하고 바탕을 청색으로 처리해 명화에 집중시키면서도 여백 효과까지 아울렀다. 과거와 현재가 연결된 화면 속에는 ‘시간’이 담기기도 하고, 잠재의식 속에 또 다른 ‘기억’을 저장하기도 했다.
◆한국 1세대 전위미술가 김구림과 이건용
한국 1세대 전위미술가들의 열정과 실험정신도 만나 볼 수 있다. 김구림 화백은 2024년의 신작 '음양'시리즈를 내보인다. 1980년대 후반부터 현재까지 이어온 그의 대표적인 연작이다. 디지털 이미지와 선명한 붓질의 아날로그적 질감 등의 요소들로 ‘대립’과 ‘조화’를 엿보게 한다. 또한 음양의 상대성을 빌려 만물의 생성과 소멸의 개념적 접근을 통하여 현대 사회의 물질주의적 욕구를 파헤친다.
실제로 김 화백은 그동안 ‘음과 양이 다른 것 같으면서도 결국 하나다’라는 화두를 내걸고 시각예술로 작업에 정진해왔다. 그는 ‘있음’은 곧 ‘없음’의 상대 개념이지만 ‘있음과 없음’은 더불어 존재한다”라고 말한다. 김 화백에게 음양 개념은 작업 세계 전반을 관통하는 평생의 화두이자 핵심이다.
이건용의 실험정신도 모습을 드러낸다. 영상, 회화, 설치, 행위예술 등 다양한 장르를 아우른 그는 연필을 비롯해 크레용, 합판, 종이 등 하찮은 매체를 활용해 행위예술에서 신체의 한계를 확장하고 시각화했다. 신체를 활용해 특유의 간명한 행위와 군더더기 없는 논리적 사건의 전개로 국제 미술계에서도 손색이 없는 행위 미술 작품들을 선보일 에정이다.
행위예술로 삶과 예술적 실천이 분리돼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확인하려 했고, 한국 사회의 비논리적인 상황과 행동들에 대한 ‘처방’을 추구했다.
이 밖에 미디어 아티스트인 이이남은 고전 서화에 디지털 기술을 접목시킨 작품을, '푸른색 사진예술의 선구자'로 불리는 고상우가 파란색을 돋보이게 한 그림을 풀어 놓는다.
김경갑 기자 kkk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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