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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 리뷰]정의와 도시: 진보된 공간적 정의를 향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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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25-09-09 15:32:31   폰트크기 변경      
백진(서울대 건축학과 교수) 저 정의와 도시(상ㆍ하)

백진 서울대 건축학과 교수
도시는 시대의 얼굴이자 사회의 기억이다. 도시계획과 건축규제라는 제도는 개인의 권리를 억누르려는 장치가 아니라, 공동으로 살아가기 위한 최소한의 질서와 정의를 세우는 틀이었다. 토지의 사적 소유권보다 공동선을 우선시하는 이 규율은 때로 불편하게 다가왔지만, 결과적으로는 공동체의 존속과 상호 이익을 가능하게 했다. 그래서 건축은 민법적 거래 이전에 공법적 규율의 대상으로 출발할 수밖에 없으며, 도시와 정의가 분리될 수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서울의 변화는 이를 가장 선명하게 보여준다. 아파트를 짓지 않고는 폭발적인 인구 집중을 수용할 수 없었던 시대적 한계, 민간 시공사의 자본 없이는 추진될 수 없었던 개발의 현실, 이러한 이유로 도입된 주택건설촉진 제도가 빚어낸 획일적이지만 균질한 주거 환경, 그리고 그 급격한 변화에 속도를 맞추어 빠르게 확산된 상업•업무 공간. 이 네 가지가 맞물리며 오늘날 서울의 골격이 형성되었다. 비록 개인과 전통이 희생되기도 했으나, 당시로서는 불가피한 측면이 있었고, 그 안에는 분명 우리 사회가 공유한 공동선의 흔적이 있다.

그러나 이제는 새로운 공동선이 요구된다. 문화적 수준이 높아지고 삶의 방식이 다변화된 지금, 공급 효율성과 균질성만으로는 더 이상 우리 사회의 요구를 충족할 수 없다. 발전의 상징이던 20세기 후반의 아파트는 어느새 저자의 표현대로 “다발성 원형탈모 도시”라는 낯선 얼굴을 하고 있다. 거대한 아파트 단지가 동시에 늙어가며 무너져 내리는 풍경은, 도시 전체가 집단적 쇠락에 휘말려 드는 장면을 불길한 전조처럼 드러낸다.

야마모토 리켄은 공동체의 기본 단위를 500명으로 보았다. 그러나 오늘날 재건축 대상이 되는 아파트 단지는 수천 세대에 이른다. 개인화가 심화된 사회에서 오히려 수천 세대가 합의해야만 정비가 가능하다는 것은 명백한 모순이다. 대규모 아파트 단지는 공급 효율을 앞세운 계산에서 탄생했다. 규모가 커질수록 용적률을 높여 공사비를 줄이고 분양수익을 극대화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당연히 분양 이후 공동체의 운영과 공간의 지속적 관리는 계산 항목에서 제외되었다. 그 결과 효율을 위해 지어진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오히려 가장 큰 비효율의 공간으로 남게 되었다. 장기간 표류하는 정비사업의 사례가 이 모순을 여실히 보여준다.

이 구조는 지금도 반복된다. 공급 확대만을 앞세운 개발 논리는 부동산 시장의 과열이라는 부작용을 낳았고, 최근에는 지역주택조합 제도의 문제로 이어지고 있다. 효율의 언어가 공동체의 정의를 잠식해 온 것이다. 그러나 건축은 단순한 축조 행위가 아니다. 그 안에는 개인의 삶이 스며들고, 공동체의 관계가 엮이며, 도시의 정체성이 자리 잡는다. 앞으로 우리나라의 도시계획과 건축규제는 영국의 제도가 그러하듯 건축물의 축조뿐 아니라 그 이후의 이용과 관리까지 아우르는 체계로 작동해야 한다.

그렇다면 오늘날 건축의 전 과정에서 우리가 추구해야 할 공간적 정의는 무엇일까? 흔히 서울을 설명할 때 떠올리는 단어는 ‘역동성’이다. 일반적으로 서울의 역동성은 마천루가 즐비한 간선도로와 그 이면의 혼돈스러운 풍경으로 묘사된다. 그러나 저자가 주목하는 역동성은 이러한 시각적 대비를 넘어, 계층과 개인이 충돌하고 교차하는 과정에서 생겨나는 다양성의 힘이다. 이 지점에서 저자의 철학적 사유가 빛을 발한다.

저자는 아리스토텔레스를 인용해 도시의 존재 이유를 자기가 부족하다는 인식, 즉 결핍의 자각에서 찾는다. 이러한 결핍은 시민적 유대를 통한 공동체의 존속과 번영으로 충족될 수 있다. 이어 니체의 사상을 빌려 범주화와 획일화가 인간의 감각을 마비시키고 사물의 생생함을 지워버린다고 지적한다. 결국 『정의와 도시』에서 지향하는 시민적 유대는 낯선 이들이 스치고 마주치며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 내는 도시에서 피어난다. 그렇기에 도시는 다양성과 역동성을 품어내는, 춤추는 공간이어야 한다. 이는 세계 어디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없는 수준으로 집적화된 초대형 메트로폴리탄 서울이 지닌 독특한 잠재력이기도 하다.

법과 제도의 역할 역시 새롭게 성찰된다. 법과 제도는 정의를 구현하는 도구이지만, 도시를 과도하게 범주화해 다양성을 억압할 위험을 안고 있다. 『정의와 도시』는 산업혁명 이후 메트로폴리탄의 변화를 성찰한 철학자들의 비판부터, 작은 집이나 일상 공간에서 의미를 찾으려 했던 사람들의 이야기까지 폭넓게 담아내며, 도시와 정의가 법과 제도를 매개로 어떻게 다시 만나야 하는지를 일깨운다. 이는 개발을 둘러싼 법적 분쟁과 제도의 변화를 다루는 법률가에게도, 도시의 미래를 고민하는 건축가와 정책가에게도 깊은 통찰을 전하며, 도시는 단순한 효율의 산물이 아니라 진보된 공간적 정의를 구현하는 무대라는 사실을 환기시킨다. 『정의와 도시』는 바로 그 과제를 내놓으며, 도시와 공동체를 고민하는 이라면 누구든 놓쳐서는 안 될 사유의 자리를 마련한다.

글 박은정 법무법인 율촌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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