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바로가기
‘이원희의 眞景’은 겸재 미학의 현대판... 50년 끈기로 일궈낸 결실
페이스북 트위터 네이버
기사입력 2026-04-20 15:28:38   폰트크기 변경      
제이원갤러리 서울에서 24일~5월25일까지 개인전...풍경화 30여점 출품


오래전 그를 만난 곳은 경기 고양시 삼송테크노밸리 작업실에서다. 떠도는 삶 속에 이제는 정착하고 싶은 곳이었다. 중견 화가 이원희(71)를 그렇게 다시 마주하게 됐다. 화실은 높다란 천장이 그림의 성전 같은 경건함을 느끼게 한다. 문을 열자 두툼하고 따뜻한 손이 덥석 손님을 반긴다. 악수만으로도 그의 인생 반 너머가 가슴을 치고 들어온다.

난해한 현대미술이 판치는 화단에서도 꿋꿋하게 구상화와 인물화에 천착해온 이 화백은 미완성의 캔버스에 둘러싸여 눈빛마저 별처럼 빛났다. 천재 화가 이인성 등 걸출한 대구 화단 선배들의 구상화풍을 계승하는 그는 “창작의 은밀한 처소인 작업장에서 매일 삶의 가느다란 희망을 건진다”고 했다.

경기 고양시 삼송테크노밸리 작업실에서 작품을 설명하고 있는 이원희 화백.  사진=김경갑


“2008년 대구 작업실을 뒤로하고 슬그머니 서울 도심(부암동)으로 빠져나왔을 때는 북적거린 분위기가 좀 거시기 했는데, 요즘은 그 시절이 오히려 그립네요. 2017년 정년을 5년 앞두고 20년간 몸담았던 교직을 떠나면서 작업실도 여기로 옮겼죠. 오히려 차분하게 버티며 작업해야겠다는 생각입니다.”

계명대 미대 학장을 지낸 이 화백은 때묻지 않은 자연의 속살과 사람의 체취를 무던히 좇아왔다. 국내외 화단에서 추상화의 대반격으로 구상은 저물어가는 장르라고 치부됐을 때 그는 “구상이란 인간에게 안식을 주는 그림”이라고 반기를 들었다. 그가 수십 년 자신의 전시회 제목으로 일관하고 있는 ‘풍경’은 미술사적으로 구상회화의 특별함을 상징한다. 오는 23일 서울 화동 제이원(J-ONE)갤러리 서울에서 개막해 다음달 25일까지 이어지는 개인전에서는 ‘풍경’ 대신 처음으로 ‘진경’을 사용했다. 그리고 ‘세상의 모든 풍경’이란 부제로 달았다. 사실적인 풍경 넘어 더 깊숙이 파고든 진짜 풍경을 보여주겠다는 뜻을 야무지게 다졌다. 이번 전시회에는 2020년부터 6년 동안 설악산, 안동, 정선, 포항, 영양 등 전국 방방곡곡을 찾아 스케치한 1만 컷 가운데 30여 점을 골라 유화로 채색한 풍경화를 걸었다. K-구상화와 인물화의 대가의 반열에 오른 작가가 전시에 맞춰 보내온 ‘물감이 채 마르지 않은 작품’들이다. 50년 고집과 끈기로 일궈낸 ‘이원희의 진경’은 조선시대 화성(畵聖) 겸재 정선이 구현했던 진경산수의 현대판으로 읽힌다.

포항 내연산 관음폭포     사진=제이원 갤러리 서울 제공


그는 “겸재처럼 ‘스케치 여행’을 다니며 미술캠프를 시작한 것도 나를 붙들어 매겠다는 선언”이라며 “무분별한 개발논리에 희생된 자연을 다시 소생하려고 몸부림을 그림으로 토해낸 것”이라고 말했다.

이 화백 구상화의 특징 중 하나는 자신이 발을 딛고 사는 땅의 풍경을 과감하게 화폭에 펼치는 것이다. 그는 겸재 정선과 단원 김홍도가 포착한 산수와 과연 같은가를 수없이 고민해 왔다. 서양화 기법의 사실적 풍경에 문기(文氣)와 문향(聞香)을 넣는 방법으로 겸재와 단원의 진경 정신을 구현하는 그 돌파구가 바로 진경이다.

이원희의 '무릉 절벽'                                              사진=제이원 갤러리 서울 제공


전시장 벽면을 지금 막 장식한 그림들은 수묵화 같은 해맑은 손맛과 색감이 한꺼번에 느껴진다. 그저 지나치다 마주하는 것과 마음을 담아 영감을 나누는 것이 작업들이다. 하얗게 물든 설악의 설봉, 포항 내연산의 깎아지른 절벽을 뚫고 나오는 관음폭포, 햇빛과 자연이 어우러진 d안동의 무릉절벽, 영양 죽파리 숲길에서 만나는 하얀 자작나무, 기상을 가득 피워내고 있는 늘 푸른 소나무, 벚꽃이 활짝 핀 고택 등에선 미감이 주르르 흐르는 것만 같다. “카메라로 줌인하듯이 우리 산하를 재해석해 자연의 맥박을 잡아냈다”고 이 화백은 짤막한 설명을 달았다.

이원희의 '설악'                    사진=제이원갤러리 서울 제공 


눈을 가볍게 쳐올려 보면 붓 맛도 살아 움직인다. 유화의 기름기와 끈끈한 점성에도 불구하고 화면마다 적막감 속에 청량감이 넘친다. 소담한 우리 산하의 풍취가 아련하고, 조선 후기 진경산수화의 회화미가 자연스럽게 묻어나 맛깔스럽기도 하다. 그는 언제나 순수회화에서 놓치고 있는 지점들을 잡아 내려 한다. 대상에 마음을 불어 넣고 화답을 구하는 식이다. 미세한 햇빛, 그리고 산세의 푸른빛, 황토색 밭도랑, 졸졸 흐르는 실개천의 은빛이 화폭에 스며들며 감돈다.

이 화백은 유독 풍경화에 집착한 이유에 대해 “현대인들의 잡다하고 이기적인 감정을 치유해 내기 위한 행위”라고 했다. 분노도 불안도 공포도 모든 것을 순수한 자연의 속살에 묻어내기 위한 붓질인 셈이다.

그는 “캔버스 앞에 앉아 있을 때에야 비로소 숨을 쉰다는 느낌을 받는다”며 “그림은 거창한 예술이 아니라 인생에서 별난 ‘맛’이어서 빠져들면 빠져들수록 새로운 세계가 열린다”고 말했다. “열정이 작업을 지배해야죠. 열정과 오기가 없으면 작품이고 뭐고 끝장이에요. 일을 가지고 놀아야 보는 사람도 즐겁습니다.”

그래서인지 물감 가득 머금은 화폭에는 마치 현대인의 아우라를 펼쳐놓은 듯 이야기가 흥건하다. “사람 손만이 담을 수 있는 온기를 사진은 따라올 수 없다”는 그의 마지막 말이 다부면서도 동시에 포근하게 들려온다.

이 화백의 초상화 역시 열정과 관록의 손때가 묻어있다. 초상화의 전통 규범에 얽매이지 않고 얼굴 자체를 자유롭게 표현하면서도 개성을 정확하게 드러내는 인물화가로 유명하다. 그는 1990년대 학생들과 함께 러시아 레핀스쿨로 연수를 가면서 유화 초상화에 천착하기 시작했다. 유럽 미술관들에 걸린 초상화들을 교과서로 삼았다. 그동안 깊고 풍부한 색감으로 그윽한 삶의 향기를 품고 있는 얼굴들을 에너지라는 감흥의 고리로 풀어내 왔다. 화면 속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심리적 상황까지 세세히 잡아낼 수 있을 정도다. 입체화법이나 바닥처리의 투시도법은 물론 카메라 옵스쿠라 기법까지 활용했다. 초상화에 있어서 인물의 외형 모사에만 그치지 않고 그 인물의 인격과 정신까지 나타내야 한다는 전통적인 전신사조 초상화론과도 맥을 같이한다.

실제로 이 화백은 삶의 흔적과 정신이 지문처럼 남은 그의 초상화는 각계 유명 인사들의 잇단 ‘러브콜’을 받고 있다. 1997년에 김영삼 당시 대통령 초상화를 그려 주목받았고, 노태우 박근혜 등 전·현직 대통령과 반기문 전 유엔사무총장, 이병철 삼성그룹 명예회장, 윤관·이용훈 전 대법원장, 김재순·이만섭·김수한·박관용·임채정 문희상 전 국회의장 등 수많은 명사의 초상화가 그의 손끝에서 완성됐다.

“각계 지도자의 얼굴에는 평범한 사람들에게선 느낄 수 없는 점이 있습니다. 정치인과 기업인들의 얼굴에서는 카리스마 같은 느낌을 더 많이 받았죠. 매스컴에 자주 등장해 친근해서 그런지 누구와 닮았는지도 금방 파악되고요. 김영삼 전 대통령의 초상화를 그릴 땐 얼굴 빛깔, 눈동자에서 나오는 빛의 강도를 데생하는 데 중점을 뒀습니다. 정우현 전 회장과 권중환 대표는 부드러운 이미지에 이목구비가 잘 생겼다는 느낌을 받았고요.”
김경갑 기자 kkk10@

〈ⓒ 대한경제신문(www.dnews.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프로필 이미지
종합콘텐츠부
김경갑 기자
kkk10@dnews.co.kr
▶ 구글 플레이스토어에서 '대한경제i' 앱을 다운받으시면
     - 종이신문을 스마트폰과 PC로보실 수 있습니다.
     - 명품 컨텐츠가 '내손안에' 대한경제i
법률라운지
사회
로딩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