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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부의 대물림과 산업전략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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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26-05-04 22:43:11   폰트크기 변경      

“통일에 찬성하십니까”라는 당위의 질문과, “북한이 인접국에 흡수되는 것을 방관하겠습니까”라는 실존적 질문은 전혀 다른 답을 요청한다. 정책의 본질은 추상적 정의(正義)를 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선택이 초래할 ‘구체적 결과’를 책임지는 일이다. 그리고, 지금 우리 자본시장의 최대 화두인 상법 개정과 지배구조 개선 논의 역시 정확한 질문을 필요로 한다.

최근 2년간 정부와 국회를 중심으로 이사의 충실의무 확대와 지배구조 개선을 위한 상법 개정 논의가 본격화됐다. 금융당국 역시 중복상장 제한, 일반주주 영향평가, 코스닥 시장 개편 등 자본시장 체질 개선안을 잇달아 내놨다. 세부 방법론에선 개선의 여지나 이견이 있겠으나, 주주 보호와 지배구조 투명성을 정책의 핵심 축으로 삼는 방향성은 타당하다.

하지만 논의가 여기서 멈춘다면 ‘반쪽짜리 진단’에 불과하다. 편법적 중복상장과 일감 몰아주기 등 주주 이익 침해 행위가 반복되는 근본 원인에 대한 성찰이 빠져 있기 때문이다. 그 이면에는 지배권 유지와 자금조달 구조의 왜곡이 얽혀 있으나, 문제의 심부(深部)에는 결국 기업승계와 상속 문제가 자리하고 있다.

한국 기업의 지배구조 문제는 대주주의 탐욕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자신의 자산을 후대에 물려주려는 의지는 경제적 본능에 가깝다. 과중한 상속세 부담과 제한된 승계 수단, 지배권 상실 위험이 맞물리면 지배주주는 규제의 빈틈을 찾는 유인에 노출된다. 이 과정에서 주주 가치와 시장 신뢰가 훼손되는 악순환이 되풀이되는 것이다.

OECD 국가 기준 실질 1위인 상속세율 문제를 재론하거나, 기업승계를 무조건 허용하자는 취지가 아니다. 부의 대물림을 어느 수준까지 인정할지는 사회적 합의와 가치관에 따른 정무적 판단의 영역이지, 절대적 옳고 그름의 문제는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직시해야 할 사실은 일반적인 상속과 달리 기업 승계 여부는 개인의 문제를 넘어 국가 경제 전반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이다. 기업의 지배자본의 성격에 따라 기업의 방향, 투자 규모와 일자리의 숫자가 달라짐을 우리는 외환위기 이후 뼈저리게 확인해 왔다.

그간 우리 사회는 ‘기업승계를 통한 부의 대물림’에 매몰되어, ‘승계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그 기업은 누가 지배하게 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충분히 논의하지 않았다. 단순히 ‘미국처럼 자본시장에 맡기면 된다’는 것은 적절한 답은 아니다. 세계 최대 자본시장, 압도적인 기관투자자 기반, 달러 패권, 세계적 수준의 기업지배구조 인프라 갖춘 미국과 한국의 시장 기초 여건은 엄연히 다르다. 창업주가 물러나도 시장이 기업을 소화할 수 있는 미국과 달리, 한국은 산업안보 환경부터가 특수하다. 삼성전자의 승계 여부를 넘어, 삼성전자의 다음 지배주주가 국내 연기금일지, 글로벌 행동주의 펀드나 중국계 자본일지는 국익과 직결되는 실존적 질문이다.

해외 자본을 배척하자는 주장이 아니다. 개방된 자본시장은 필수적이고, 외국인 투자자는 한국 기업가치 제고에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그러나 미국과 유럽 등 주요국 대부분도 반도체, 통신, 방산, 에너지, 플랫폼, 금융 인프라와 같은 전략산업에 대해서는 해외 자본 진입에 대한 엄격한 통제 장치를 갖추고 있다. 자본 자유화와 전략산업 보호는 서로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 현실 정책에서 반드시 함께 조정해야 할 가치다.

기업 승계가 반드시 부의 대물림과 결부되는 것도 아니다. 독일은 일정기간 고용 유지 시 가업 자산 상속세를 감면하며 기업의 존속을 국가적 과제로 다룬다. 스웨덴과 덴마크 역시 공익재단과 차등의결권 제도를 통해 경영권은 안정적으로 보호하되, 기업 수익의 사회 환원을 유도하는 모델을 정착시켰다. 이러한 사례들은 정교한 제도 설계가 뒷받침된다면 기업승계가 사적 이익을 넘어 공적 가치와 충분히 공존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기업승계는 더 이상 ‘부의 대물림’이라는 협소한 가치 프레임에만 갇혀서는 안 된다. 고용·투자·기술·국가전략산업의 연속성과 시장질서 확립이라는 중층적인 정책 목표들과 같이 조화롭게 논의되어야 한다. 우리 자신에게 적절한 질문을 물어야, 대한민국에 필요한 해답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허준석 법무법인 선운 파트너 변호사(법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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