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지와 먹의 물성을 뛰어넘어
비움으로 채운 ‘잔여의 미학’
그림-설치 작품 등 25점 출품
추상 및 설치미술가 이영애 화백(61)은 현대 사회의 속도전 속에서 ‘채움’과 ‘비움’을 제안하며 줄곧 화업을 이어왔다. 붓과 먹을 손에 쥐고 평생을 꿋꿋하게 불나방처럼 살아온 그에게 미술은 인생의 세찬 폭풍우를 견디게 해준 반려자 같은 존재다. 인생 고비마다 미술세계는 위안이 돼 주었다. 모진 고통을 인내하며 땅에 엎드리다시피 하며 붓질을 이어갔다. 붓을 들고 작업을 시작하면 모든 시름이 바람처럼 사라지는게 신기했다. 자신이 아슬아슬한 벼랑 끝에 섰을 때도 붓을 들고 갠버스 앞에 서면 모든 것들이 거짓말처럼 정리가 됐다. 그래서 그의 그림은 한지 위에 동양의 정신을 펼치고, 먹으로 선(禪)사상을 다독이는 액션페인팅 같은 것이다. 미술을 통해 사람들의 속풀이 마당을 연출한 추상 미술가 이영애가 붓끝으로 세상을 깨우는 이유다.
| 이영애 화백이 6일 스텔라갤러리의 초대전에 출품한 작품들을 설명하고 있다. 사진=김경갑 |
그렇게 화가로 40년의 긴 시간을 살아온 그를 또 한 번 전시장으로 불러냈다. 6일 시작해 오는 28일까지 서울 강남구 논현동 스텔라갤러리에서 여는 초대전을 통해서다.
‘겹(RESIDUAL) 108’이란 철학적 주제를 걸고 작업실에서 몸부림치며 완성한 미학 세계를 입체적으로 보여주는 자리다. 매일 12시간 넘게 작업실에 파묻혀 죽어라 그림에만 매달려 대차게 꾸린 10호 소품에서 거대한 설치작품까지 근작 ‘겹’ 과 ‘흔적을 기록하다’ 시리즈 25점을 풀어놓았다. 수천 번의 붓질을 통해 번뇌를 씻어내고 무아(無我)의 경지에 도달하는 것 같은 느낌을 자아내는 작품들이다. 붓질이 여과지를 통과하며 남겨진 ‘잔여물(Residual)’ 처럼 화면 가득 생명력과 숭고미가 잘 드러나 있다.
서울여대 산업미술과를 나온 이 화백은 단색화 기법에 착안해 명상과 행위를 자신의 조형 언어로 채택했다. 현대 사회의 어두운 단면을 미적 감성으로 치환하기 위해서다. 자신을 무아의 경지의 극한점으로 몰아가며 미친 듯 몸을 낮춰서 작업을 해 온 그는 뒤늦게 동국대 불교대학원에 들어갔다. 불교의 핵심사상인 무상과 무아, 공과 색, 연기론을 집중적으로 파고들며 자신의 미학 세계를 완성해 나갔다. 불교사상을 응축해서인지 최근 작업들은 묘한 파라다이스 같은 환희가 넘쳐 흐른다. 실제로 그는 “불교의 연기론과 무아, 공과 색의 세계를 화면에 녹여냈더니 이제야 그림이 조금 보인다”고 했다. 그림은 색채 이전에 반복적인 행위와 흔적을 통해 채움과 비움의 조화를 이룬 균형의 미학이란 사실을 명확히 깨달은 것이다. 그래서인지 그의 화면은 수만 번의 붓질로 쌓아 올린 시간의 적층인 동시에 존재의 근원을 찾아가는 수행의 기록으로 읽힌다. 동양의 선(禪)사상을 현대적 조형 언어로 풀어내다는 점에서 한편의 드라마같은 느낌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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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치작품 ‘흔적을 기록하다’ 앞에선 이영애 화백. 사진=스텔라갤러리 제공 |
전시장을 꽉 채운 25점의 그림과 설치작업들은 불교적 스토리와 회화적 역량을 굵직한 선과 검은 색채로 녹여낸 근작들이다. 얇은 한지 위에 먹물을 찍어 누르는 행위를 무려 3000번 이상 반복하며 시간의 층위를 쌓아 올린 게 특징이다. 한지와 먹의 물성 너머 비움으로 채운 ‘잔여의 미학’인 셈이다. 복잡한 일상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영혼의 안식과 성찰의 시간을 선사할 것으로 기대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또 다른 연작 ‘흔적을 기록하다’에서는 유화, 아크릴, 먹 등 이질적인 재료들의 만남이 두드러진다. 서로 섞이지 않는 재료들이 밀어내고 서로 다투며 ‘경계’와 ‘틈’을 조화롭게 구축했다는 게 작가의 설명이다. 이는 타자성을 존중하고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며 조화를 이루는 현대적 공존의 메시지를 시각적으로 보여준 것이다.
또 한 주택을 개조한 스텔라갤러리만의 독특한 공간적 특성에 맞춰 작품들을 배치한 것도 이채롭다. 정형화된 ‘화이트 큐브’를 벗어나, 여러 개의 방으로 나뉜 다양한 성격의 공간에 작품이 유기적으로 배치해 관람객의 몰입도를 높였다. 특히 한지를 겹겹이 쌓아 올린 설치 작품은 공간의 자연광 및 구조적 틈새와 어우러져, 평면의 한계를 넘어선 입체적인 ‘침묵의 성전’처럼 꾸몄다. 이 화백이 추구하는 ‘존재들이 스스로 숨 쉴 수 있는 여백’을 시각적으로 극대화한 결과물이다.
미술평론가 김윤섭 씨는 ”동양의 선(禪)적 정신성을 현대적 조형 언어로 풀어낸 이번 이영애 개인전은 복잡한 일상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무의식의 편안한 시간을 줄 것으로 기대된다“며 ”관람객은 겹겹이 쌓인 먹의 층위 사이에서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치유의 공간’을 경험하게 된다“고 평했다.
김경갑 기자 kkk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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