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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기술은 있는데, 왜 현장은 변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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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26-05-19 04:00:11   폰트크기 변경      

영화 ‘Tomorrowland(2015)’에서 주인공 케이시는 작은 핀 배지 하나를 손에 쥐는 순간, 눈앞에 미래 도시가 펼쳐진다. 기술과 가능성이 이미 구현된 세계다. 그러나 영화는 미래를 예측하고도 결국 체념해버린 인간 사회의 모습도 함께 보여준다. 문제는 기술의 부재가 아니라, 그것을 선택하고 실행하지 못하게 만드는 환경과 구조에 있다.

스마트 건설, BIM 기반 설계·시공, 자동화 장비, 건설 로봇 등 주요 기술은 이미 설계와 시공을 통합하고 반복 공정을 자동화할 수 있는 수준까지 발전해 있다. CES 2026에서도 산업 현장에서 작업을 수행하는 로봇과 AI 기반 자동화 시스템이 소개되며, 기술이 이미 적용 단계에 들어섰음을 보여주었다. 그럼에도 현장은 변하지 않는다. 생산성과 안전 문제는 좀처럼 개선되지 않는다.

원인은 분명하다. 기술이 아니라 구조다. 지금의 시스템은 기술을 적용하는 것보다 적용하지 않는 것이 더 안전하도록 설계돼 있다. 감사와 사후 책임이 개인에게 집중되는 환경에서 새로운 기술 도입은 혁신이 아니라 리스크가 된다. 인증은 존재하지만, 적용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기술과 현장을 연결하는 구조가 작동하지 않기 때문이다.

반면 글로벌 선도국들은 전혀 다른 길을 걷고 있다. 미국은 시장 중심 구조를 통해 기술 적용을 촉진한다. 발주자는 기술 선택을 제한하기보다 계약을 통해 성과를 요구하고, 리스크는 시장에서 분산된다. 실제로 연방조달청(GSA)을 중심으로 공공부문에서는 BIM 기반 설계와 디지털 협업이 정착됐고, 민간에서는 모듈러 건설과 자동화 공법이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기술은 ‘감사 대상’이 아니라 ‘성과 수단’으로 작동하고, 시장 안에서 자연스럽게 확산된다.


2020년 영국 정부가 발표한 ‘Construction Playbook’. 공공 건설사업의 조달·수행 기준을 재설계하며, 초기 참여·성과 중심 발주·디지털 활용을 통해 공공이 혁신의 수요자로서 산업 변화를 이끄는 정책 프레임을 제시한다. /사진:UK Cabinet Office


영국은 정부가 혁신의 첫 번째 수요자가 된다. 2020년 발표된 ‘Construction Playbook’은 공공 공사의 조달과 수행 원칙으로 디지털 기술 활용과 결과 중심 접근을 제시한다. 설계 단계부터 시공사와 기술기업이 함께 참여하도록 해 기술이 처음부터 반영되도록 했다. 공공 프로젝트 자체를 산업 혁신의 실험장으로 활용하는 것이다.

싱가포르는 기술 적용을 제도화했다. 건설청(BCA)은 일정 규모 이상 프로젝트에 BIM 제출을 의무화하고, 설계 단계부터 시공 효율성과 공장 제작 방식을 평가하는 ‘Buildability framework’를 통해 DfMA(공장 제작·조립 중심 건설 방식) 기반 건설을 확산시키고 있다. 기술을 선택이 아닌 ‘사업의 기본 조건’으로 만든 것이다.

이들 국가의 공통점은 분명하다. 기술 개발보다, 기술이 작동하는 구조를 먼저 설계했다는 점이다. 반면 우리는 기술을 ‘현장에 적용하는 산업’이 아니라, ‘인증하는 행정 체계’에 가까운 구조를 유지하고 있다. 이제 경쟁은 기술의 보유가 아니라, 기술을 현장에서 작동시키는 속도에서 결정된다. 실제로 건설산업의 생산성은 지난 20여 년간 사실상 정체 상태에 머물러 있다. 맥킨지(McKinsey) 분석에 따르면 건설산업의 연평균 생산성 증가율은 약 1%에 머물렀다. 제조업이 같은 기간 2~3% 수준의 향상을 이어간 것과는 대조적이다. 산업 경쟁력을 가르는 것은 기술 자체가 아니라, 이를 작동시키는 구조다.

이제 방향은 분명하다. 첫째, 책임 구조를 전환해야 한다. 신기술 적용 리스크를 개인이 아닌 계약과 제도로 분산하는 체계를 구축해야 한다. 둘째, 공공을 Testbed로 전환해야 한다. 신기술은 공공이 책임지고 검증하고, 이미 검증된 기술은 지체 없이 현장에 적용되도록 하는 구조가 필요하다. 셋째, 발주 방식을 바꿔야 한다. 공정 중심 관리에서 벗어나, 과정이 아니라 성능과 결과로 평가하는 성과 기반 발주(PBSA) 체계를 도입해야 한다.

“미래는 이미 와 있다. 다만 고르게 분포되어 있지 않을 뿐이다.” 작가 윌리엄 깁슨(William Gibson)의 이 문장은 지금 건설산업의 현실을 정확히 짚는다. 기술은 이미 미래를 구현하고 있지만, 현장은 여전히 관행의 구조 안에 머물러 있다. 미래를 결정하는 것은 기술의 수준이 아니라, 기술을 작동시키는 구조의 수준이다.


김형렬 연세대학교 건설환경공학부 객원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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