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경제=김호윤 기자] 머리가 지끈거릴 때, 이를 뽑고 난 다음 날, 생리통으로 몸을 웅크린 날.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약통에서 꺼내 든 알약이 있다. 바로 ‘게보린’이다.
올해로 47살이 된 이 작은 알약은 그동안 도대체 몇 알이나 팔렸을까. 삼진제약이 공개한 숫자는 놀랍다. 누적 생산량 약 42억 정. 알약 하나하나를 일렬로 이어 붙이면 지구를 네 바퀴 넘게 돌 수 있는 양이다. 대한민국 국민 한 사람당 80알 넘게 삼킨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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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보린 / 사진: 삼진제약 제공 |
게보린의 출발점은 197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삼진제약이 스위스 제약사 ‘가이스트리社’와 손을 잡고 ‘게보나 정’이라는 이름으로 첫선을 보인 것이 시작이었다. 낯선 이름이었지만 효능만큼은 확실했다. 입소문은 빠르게 퍼졌고, 2년 만인 1979년 지금의 이름 ‘게보린’으로 새단장했다.
마침 그 시절 한국은 격동의 시대였다. 산업화의 물결 속에 공장과 건설 현장에서 고된 하루를 보내던 사람들, 입시 스트레스로 머리를 싸매던 학생들, 시장에서 하루 종일 발품을 팔던 상인들. 게보린은 그 모든 이들의 지친 일상 속으로 조용히 스며들었다.
1980년대 들어 게보린은 결정적인 전환점을 맞는다. “두통, 치통, 생리통… 맞다! 게보린”이라는 슬로건이 TV 광고를 타고 안방극장을 파고든 것이다. 리듬감 있는 카피는 금세 유행어처럼 번졌다.
그러던 1983년, 예상치 못한 순간이 찾아왔다. KBS가 기획한 이산가족 찾기 생방송에서 수십 년 만에 극적으로 재회한 가족들이 서로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맞다! 맞다!”를 연신 외치는 장면이 전파를 탔다. 온 국민이 눈물을 쏟았던 그 장면은 공교롭게도 게보린의 광고 카피와 정확히 겹쳐졌다. 광고가 시대의 정서를 품은 순간이었다. 이후 ‘맞다! 게보린’은 단순한 광고 문구를 넘어, 한국인의 집단 기억 속에 각인된 문화적 코드가 됐다.
47년이면 사람으로 치면 중년의 나이다. 게보린도 세월 앞에 멈추지 않았다. 삼진제약은 “삼키기 어렵다”는 여성과 고령자들의 목소리를 반영해 정제 크기를 줄였다. 여기서 멈추지 않고 균질 과립화 기술을 새롭게 적용, 흡수 속도를 기존 대비 약 3배 끌어올렸다. 아세트아미노펜 등 3가지 복합 성분의 시너지로 두통은 물론 인후통·발열·오한까지 폭넓게 잡는 것도 여전한 강점이다.
국내에서 직접 제조·공급하다 보니 해외 수입 의존 제품처럼 물류 차질이나 품절 걱정도 없다. 반세기 가까운 제조 경험이 쌓인 공장에서 오늘도 묵묵히 알약이 찍혀 나오고 있다.
2019년부터는 새로운 도전에 나섰다. 단일 제품이던 게보린을 통증 유형별 전문 라인업으로 확장한 것이다. 생리통에 특화된 ‘게보린 소프트’, 근육통을 겨냥해 국내 최초 이중 연질 캡슐로 출시된 ‘게보린 릴랙스’가 잇따라 등장했다. '두통약'이라는 오랜 이미지를 벗고 통증 케어 전문 브랜드로의 변신을 선언한 셈이다.
그 결과는 숫자로 증명됐다. 한국소비자포럼과 미국 브랜드 컨설팅사 브랜드키가 공동 발표하는 브랜드 고객 충성도 조사에서 진통제 부문 10년 연속 1위를 달성했다.
47년 전 스위스에서 건너온 작은 씨앗 하나가, 42억 알의 기억을 품은 채 오늘도 한국인 곁에 있다.
김호윤 기자 khy2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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