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H 부지 확보 등 지연… 5년 후 착공
시공사 지연보상금 104억 청구 소송
法 “착공 후 공사정지된 경우만 해당”
발주처 착공 미뤄 보상금 회피 우려
법조계 “시공사 권리 과도하게 제한”
[대한경제=이승윤 기자] 발주기관의 책임으로 공사 착공 자체가 수년간 지연됐더라도 계약예규상 ‘공사정지’에 따른 지연보상금을 청구할 수 없다는 대법원 판결이 나왔다. ‘착공 자체가 지연된 경우’와 ‘착공 후 공사가 정지된 경우’는 엄연히 다른 만큼 지연보상금 규정은 실제 착공 이후 공사가 정지된 경우에만 적용된다는 취지다.
건설업계 안팎에서는 이번 판결에 따라 발주자의 책임으로 공사를 진행할 수 없는 경우에도 착공을 미루는 방식으로 지연보상금 지급을 회피하는 등 발주자의 탈법행위가 늘어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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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원 1부(주심 서경환 대법관)는 건설사인 A사와 B사가 한국토지주택공사(LH)를 상대로 낸 공사대금 등 청구 소송 상고심에서 원고 패소로 판단한 원심 판결을 확정했다고 20일 밝혔다.
AㆍB사는 컨소시엄(공동수급체)을 구성해 LH가 발주한 경기 화성 봉담 국도 43호선 확장ㆍ포장 및 지하차도 공사를 약 363억원에 맡기로 도급계약을 맺었다.
A사 등은 2009년 12월 착공신고서를 제출했지만, LH의 사업부지 확보 등 절차가 지연되면서 장기간 착공이 미뤄졌다. 그 사이 A사 등은 현장관리인을 계속 배치하고 착공 준비를 이어갔으며, LH도 여러 차례 착공을 준비하라는 취지의 공문을 보냈다.
실제 공사는 5년이 훌쩍 넘은 2015년 8월에야 시작됐다. 이후 설계변경과 공기연장 등을 거쳐 최종 계약금액은 약 571억원으로 늘었고, 2021년 6월 공사가 마무리되자 LH는 공사대금을 모두 지급했다.
그러나 A사 등은 발주자인 LH의 책임으로 공사가 사실상 중단된 2010년 7월부터 실제 착공이 이뤄진 2015년 8월까지 1875일 동안 발생한 공사정지에 따른 지연보상금 104억원도 지급하라며 소송에 나섰다.
재정경제부 계약예규인 ‘공사계약일반조건’ 제47조 6항은 발주기관의 책임 있는 사유로 공사정지 기간이 60일을 초과하면 초과 기간에 대한 지연보상금을 지급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공사가 정지되면 준공기일이 연기되고 준공대금 지급도 미뤄지는 만큼 계약 상대방의 불이익을 보상하기 위한 규정으로, 잔여 계약금액에 초과일수 1일마다 일정한 금리를 곱해 산출하는 방식이다.
LH 측은 “A사 등은 2015년 8월 이전에는 공사를 위한 준비행위만 했을 뿐, 실질적인 착공이나 공사 수행을 한 적이 없다”며 “지연보상금 규정은 착공 후 공사가 정지된 경우에만 적용된다고 봐야 하고, 착공조차 되지 않은 상태에서 착공이 지연된 경우에는 적용될 수 없다”고 맞섰다.
재판 과정에서는 계약예규상 ‘공사정지’에 실제 공사가 시작되지 못한 ‘착공지연’까지 포함되는지가 쟁점이 됐다.
1ㆍ2심의 판단은 엇갈렸다.
1심은 “A사 등이 실질적인 착공에 이르지 못한 상태에서 공사가 정지됐더라도 지연보상금 규정에서 말하는 공사정지 기간에 해당한다”며 A사 등의 손을 들어줬다.
도급인의 책임 있는 사유에 따라 착공이 늦어진 경우와 착공 후 공사가 중단된 경우 모두 공사 지연으로 수급인이 공사대금을 늦게 지급받는 등 경제적 손실을 입는다는 점에서 실질적으로 차이가 없다는 이유다. 다만 지연보상금은 실제 손해 규모 등을 감안해 청구금액의 절반가량인 약 49억원만 인정됐다.
반면 2심은 “지연보상금 규정은 ‘착공 후 공사가 정지되는 경우’에 적용되는 것이고, ‘착공 자체가 지연된 경우’에는 적용되지 않는다고 봐야 한다”며 1심의 판단을 뒤집었다. 지연보상금 규정은 발주기관에 중대한 금전적인 책임을 부과하는 만큼 엄격하게 해석ㆍ적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공사 이행과 계약 내용이 일치하는지 판별하려면 논리적으로 공사가 이미 이행된 부분이 있어야 하는데, ‘착공지연’과 ‘착공 후 공사정지’는 개념상 확연히 구별된다는 게 2심의 판단이었다.
A사 등은 상고했지만, 대법원도 2심의 판단이 옳다고 봤다.
대법원은 해당 규정에 대해 “‘공사정지’, ‘잔여 계약금액’이라는 문언상 공사가 착공돼 일정 부분 진행된 경우를 전제로 한 것”이라며 “사실상 착공 후 공사정지 상태를 전제로 하는 것으로 볼 여지가 충분하므로, ‘착공 후 공사가 정지된 경우’에만 적용된다고 해석함이 타당하다”고 판단했다.
그러면서 “이 사건 조항이 착공지연에 적용되지 않는다고 보면, 도급인의 책임 있는 사유로 착공이 지연됐음에도 그에 따른 손실을 수급인이 부담하게 될 우려가 있긴 하다”면서도 “수급인은 착공지연을 이유로 계약기간 연장 및 계약금액 조정을 신청할 수 있으므로, (지연배상 규정을 적용하지 않더라도) 수급인에게 일방적으로 불리한 결과가 초래된다고 단정하기 어렵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법조계와 건설업계에서는 이번 판결에 따른 우려가 적지 않다.
시공사의 손해라는 측면에서는 차이가 없는데도 ‘착공’의 의미를 지나치게 엄격히 해석해 착공 이후 공사가 정지된 경우에만 지연배상 책임을 인정하면 시공사의 권리를 과도하게 제한할 수 있다는 것이다.
건설클레임 전문가인 C변호사는 “대법원이 발주자 책임에 따른 착공지연에 대해 수급인의 공기연장 신청과 계약금액 조정이 가능하다는 점을 판단 근거로 들었지만, 간접비 계약금액 조정 신청과 공사정지에 따른 지연보상금은 제도의 목적과 취지가 다른 별개의 권리”라고 지적했다. 간접비는 공기연장 기간 중 지출된 공사비용을 실비를 기준으로 지급하는 것인 반면, 지연보상금은 공사정지에 따라 공사대금 지급이 미뤄져 발생한 금융비용 상당의 손해를 보전해 주기 위한 제도이기 때문이다.
A사 등을 대리한 법무법인 율촌의 조원준 변호사도 “계약예규를 만든 기획재정부가 착공 전 공사정지에 대해서도 지연배상금이 발생한다는 유권해석을 내렸던 만큼, 법원이 주무부처 입장보다 보수적으로 해석한 것은 다소 아쉽다”며 “계약 상대방인 건설사들은 대법원이 착공 개념과 공사정지 범위에 대해 매우 엄격하게 보고 있음을 유의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이어 “단순히 물리적인 착공 여부에 따라 수년간의 공사정지에 대한 배상 여부가 달라질 수 있으므로 계약 체결 후 발주자의 귀책사유로 공사가 지연되는 경우에는 착공 후 공사정지가 이뤄지도록 현장을 운영할 필요가 있고, 관련 공문이나 실정보고를 통해 발주자의 공사정지 지시와 실질적인 착공 사실에 대한 객관적인 근거를 충분히 남겨둬야 한다”고 당부했다.
이승윤 기자 lees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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