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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61년, 한국 해외건설은 셀 수 없이 많은 도로와 항만, 플랜트를 지으며 몸집을 키웠다. 그런데도 지난 반세기를 돌아보면 어딘가 씁쓸한 뒷맛이 남는다. 한국 건설사들은 늘 ‘을’이었다. 설계는 벡텔이, 감리는 AECOM이, 표준은 FIDIC이 정했고, 한국 기업들은 그 규격 안에서 가장 낮은 가격에 가장 빨리 짓는 역할을 맡아왔다. 실력은 세계 최고 수준이라는 평가를 받으면서도, 언제나 도급자의 위치에 서있었다.
그렇기에 지난 20일 정부가 발표한‘K-AI 패키지 추진전략’은 단순한 정책 발표 이상의 무게를 갖는다. 이 전략의 진짜 의미는, 우리의 앞선 AI 기술력을 내세워 처음으로 ‘표준을 심는 쪽’에 서보겠다는 선언이라는 데 있다. 시공 실력만으로 승부하던 을의 자리에서, 사업 전체를 설계하는 자리로 옮겨가겠다는 것이다. 국내 건설사들이 이제서야 국가 차원의 ‘플랫폼 장악형’ 전천후 지원을 받게 된 셈이다. 61년 만에 대전환이다.
다만 취재를 하면 할수록 마음에 걸리는 대목도 있다. 한국 건설사들이 가장 취약한 지점은 PM(프로젝트 매니지먼트) 역량이다. 2010년대 중동 플랜트에서 국내 대형 건설사들이 줄줄이 조 단위 손실을 냈던 사례가 대표적이다. 저가로 따낸 사업에서 설계 변경과 공기 지연이 겹치자, 이를 통제하고 발주처와 협상할 종합 관리 능력이 뒷받침되지 못했다. 시공은 세계 최고 수준인데 사업 전체를 조율하는 힘은 약하다는 지적은 업계에서 수십 년째 반복돼온 얘기다. K-AI 패키지는 설계ㆍ시공에 AI 데이터센터, 전력, 재원 조달까지 얹은 복합 사업이다. 다루는 변수가 많아진 만큼, 사업 전체를 그릴 줄 아는 PM 역량이 예전보다 훨씬 더 중요해졌다는 뜻이기도 하다.
글로벌 스탠다드를 쥐는 것과 사업을 성공시키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다. AI 솔루션 하나, 데이터센터 하나를 잘 설계했다고 해서 재원 조달부터 운영까지 이어지는 전체 사슬이 저절로 굴러가지는 않는다. 오히려 다뤄야 할 변수가 늘어난 만큼, 어느 한 구간에서 관리가 삐끗하면 이전보다 더 크게 흔들릴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국내 건설사들이 이번 기회를 살리려면 시공 조직 위에 AI ㆍ금융ㆍ리스크 관리를 아우르는 통합 PM 조직을 새로 짜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이유다.
정부가 표준을 심을 자리를 만들어줬다면, 그 자리를 지키는 것은 결국 기업의 몫이다. 다만 지금은 예전처럼 실패를 겪으며 천천히 역량을 키울 여유가 없다. PM 역량을 갖추는 일도 처음부터 정교하게, 빠르게 해내야 한다는 뜻이다. 61년간 을의 자리에서 벗어나 사업 전체를 지휘하는 컨트롤타워로 탈바꿈할 기회가 눈앞에 왔다. 그 기회를 잡는 것은, 현재 수익성 다변화 기로에 선 건설업계에 떨어진 가장 큰 과제다.
최지희 기자 jh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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