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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혁식의 정치 클릭] 돌아온 ‘무신불립’, 보수에게 약인가 독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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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26-08-29 17:39:18   폰트크기 변경      

27일 경기도 고양시 장항동 소노캄 고양에서 열린 2026 국민의힘 국회의원 연찬회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과 장동혁 대표를 비롯한 참석 의원들이 기념 촬영하고 있다.  장 대표는 활짝 웃고 있지만 정점식 원내대표 표정은 그다지 밝지 않다. /사진: 연합뉴스

박근혜 전 대통령은 27일 오후 경기도 고양에 있는 한 호텔에서 진행된 국민의힘 국회의원 연찬회에 참석해 “저는 정치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신뢰라고 생각한다”며 “‘무신불립’이란 말을 알고 계실 텐데, 신의가 없으면 그 어떤 조직도 존속할 수가 없다”고 말했다.

박 전 대통령의 ‘무신불립’ 발언은 지극히 원론적으로 들릴 수도 있겠지만, 지난 2012년 새누리당 대선 후보 시절 이후 14년 만에 참석한 당 연찬회에서 던진 일성이란 점을 감안하면 곱씹어볼 필요가 있다.


박 전 대통령의 정치 여정에서 ‘신의와 배신’을 둘러싼 최대 악연은 지금도 ‘배신자 프레임’에 갇혀 있는 유승민 전 의원이다. 유 전 의원은 2015년 여당인 새누리당 원내대표 시절 원내교섭단체 대표연설에서 “증세 없는 복지는 허구”라며 정부 정책을 비판해 청와대의 비위를 거스른 데 이어 시행령 등 행정입법에 국회가 수정을 요구할 수 있도록 한 국회법 개정안을 야당과 합의해 통과시켰다. 이에 박 전 대통령은 거부권을 행사하면서 “배신의 정치, 반드시 선거에서 국민이 심판해주셔야 한다”고 못 박았다.


이 사건을 계기로 유 전 의원은 친박계 의원들의 압박에 못 이겨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란 말을 남기고 원내대표에서 도중하차해야 했다. 이듬해 12월 박근혜 대통령 탄핵소추안 표결에서 유 전 의원을 비롯한 비박계 의원들이 찬성표를 던지면서 두 사람의 관계는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넜다.

그런 박 전 대통령이 ‘배신의 정치’를 거론한 지 11년 만에 다시 ‘무신불립’을 들고 국민의힘 한복판에 돌아왔다. 공교롭게도 지금 국민의힘 역시 ‘신의와 배신’을 둘러싼 내전 중이다. 한때 윤석열 전 대통령과 정치적으로 한배를 탔던 한동훈 전 대표는 12·3 비상계엄과 탄핵 정국을 거치면서 그와 결별했고, 윤 전 대통령 지지층에서는 ‘배신자’라고 공격받고 있다. 박근혜 정부에서 유승민에게 씌워졌던 프레임이 윤석열 정부를 거치면서 한동훈에게 옮겨붙은 모양새다.

반대편에는 장동혁 대표가 있다. 한때 한 전 대표의 핵심 측근으로 꼽혔던 장 대표는 탄핵 이후 윤 전 대통령 곁에 남는 길을 택했다. 윤 전 대통령 탄핵 이후에도 ‘윤어게인 세력’과 결별하지 못하면서 중도층 확장에 실패했고, 6·3 지방선거 참패 이후 당내 사퇴 요구에도 귀를 막았다. 취임 1주년 기자회견에서는 “지금 치열하게 싸워야 할 대상은 여당과 이재명 정권”이라며 자신을 중심으로 한 당내 단합을 외쳤다.


이런 상황에서 박 전 대통령이 “정당 내에서 신의가 없으면 그 정당은 존립할 수 없다”면서 “어려운 때일수록 지도부를 중심으로 일치단결해서 나아가야 한다”고 당부한 것이다. 장 대표와 노선 갈등을 빚고 있는 정점식 원내대표의 초청으로 연찬회에 참석했지만 박 전 대통령 메시지의 최대 수혜자는 장 대표라는 해석이 그래서 나온다. 그래선인지 이날 기념 사진을 보면 장 대표 얼굴은 활짝 웃고 있지만 정 원내대표 표정은 굳어 있다.

소수 야당이 거대 여당을 상대하려면 단합해야 한다는 박 전 대통령의 주문은 백번 옳다. 당이라는 둥지가 깨지면 그 안의 알도 온전할 수 없다는 비유 역시 설득력이 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지금 ‘무신불립’이란 메시지는 국민의힘 단합뿐 아니라 보수 진영 통합을 방해하는 최대 악재로 작용할 수도 있다. 그것이 탄핵 당한 윤 전 대통령과의 신의에 매달리는 장 대표 체제의 기득권을 보호하는 방패막이가 되는 동시에 보수 통합과 재건을 이끌 새로운 리더십들이 경쟁할 정치적 공간을 가로막는 걸림돌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공자가 말한 ‘무신불립’에서 ‘신의’는 조직 내부자 간의 그것을 뜻한 게 아니다. '논어'에서 자공이 정치에 필요한 것을 묻자 공자는 식량과 군비, 백성의 신뢰를 들었다. 그 가운데 무엇을 먼저 버려야 하느냐는 질문에 군비를, 다시 하나를 더 버려야 한다면 식량을 버리라고 했다. 마지막까지 버려서는 안 되는 것이 백성의 신뢰였다. 그래서 나온 말이 ‘민무신불립(民無信不立)’, 백성의 믿음이 없으면 나라가 설 수 없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대통령에 대한 신의도, 당 대표에 대한 충성도 없다. 정치인들끼리 의리를 지키라는 가르침은 더더욱 아니다. 정치가 마지막까지 지켜야 할 신의의 상대는 국민이라는 뜻이다.

신의가 특정 지도자에 대한 충성으로 바뀌는 순간 ‘무신불립’은 진영의 독이 된다. 대통령과 생각이 다르면 배신이고, 당 지도부와 다른 목소리를 내면 변절이라는 식의 논리가 작동하면 정당은 국민을 바라보는 대신 내부의 배신자 색출에 열을 올리게 된다. 박근혜 정부의 보수 붕괴 과정이 그랬다. 유승민을 배신자로 몬다고 보수 진영이 강해진 것이 아니었다. 배신자 낙인은 결국 정치적 결별을 낳았고, 탄핵과 분당을 거치면서 보수 전체가 무너졌다. 그런 역사가 불과 10년 전의 일이다.

사람에 대한 신의를 정치의 최고 가치로 올려놓는 순간 한국 보수는 퇴행할 수밖에 없다. 보수가 지금 되찾아야 할 것은 특정 정치인에 대한 신의나 내부자 간 신뢰가 아니다. 국민의 신뢰다. 그러려면 과거의 인연과 신의에 얽매이기보다 보수 재건을 이끌 새로운 리더십들이 경쟁할 수 있는 정치적 공간부터 열어야 한다.

권혁식 논설위원 kwonh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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