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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공급자를 의심하면서 공급을 늘릴 수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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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26-09-01 04:00:20   폰트크기 변경      

가는 길이 막혔다면 새 길을 찾기 전에 왜 길이 막혔는지 살펴야 하지 않을까. 주택문제의 해법으로 대규모 공급을 내건 대한민국과 영국의 주택공급 방식이 사뭇 다르다. 2024년 집권한 영국 노동당은 이번 의회 임기 동안 150만호 공급을 약속했다. 국가계획정책체계(National Planning Policy Framework· NPPF)를 고쳐 지방정부의 주택공급 목표를 의무화하면서 보전 가치가 낮은 그린벨트(영국에서는 이를 ‘그레이벨트(Grey Belt)’로 분류)를 활용할 수 있게 했고, '계획·인프라법(Planning and Infrastructure Act),2025'을 제정해 인허가의 속도와 예측 가능성도 높였다. 공공임대주택(Council Housing) 확대를 오래 주장해온 노동당마저, 정부 혼자 150만호를 지을 수 없다는 현실을 인정했다. 주목할 만한 변신이다. 민간을 공급의 파트너로 보고, 민간이 움직일 수 있도록 계획제도의 병목부터 푼 것이다. 중앙정부와 지방정부, 민간의 역할을 주택공급이라는 하나의 목표에 맞춘 것이다.

우리 정부도 공급을 외친다. 그러나 공급자를 바라보는 시선은 다르다. 민간 재개발·재건축은 투기와 불로소득을 만들지만 공공이 주도하는 공급은 그렇지 않다는 오래된 이분법이 정책 곳곳에서 읽힌다. 민간 정비사업에는 조합원 지위양도와 대출을 제한하면서 공공정비사업에는 용적률 등 인센티브를 더 주고 있다. 2022~2025년 서울 신규 분양아파트의 80% 이상이 재개발·재건축 등에서 나왔다. 서울에서 주택 공급을 늘리겠다면 새 땅을 찾기보다 이미 움직이고 있는 정비사업을 빨리 움직이게 하는 것이 순서다. 국토교통부에 따르면 정부가 30개월로 줄이겠다는 3기 신도시조차 현장에서는 최대 19개월 더 걸릴 것으로 본다.


최근 논란이 된 용산공원은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용산공원의 물량은 매력적이지만, 토양정화·도시계획·사회적 합의를 새로 거쳐야 할 땅이 신속공급의 답일까. 최근 정부가 민간 정비사업 규제 완화 쪽으로 무게중심을 옮기려는 조짐을 보이는 것은, 시급한 건 공급의 양이 아니라 속도라는 것을 어느 정도 인지하기 시작했다는 신호로 읽힌다. 주택 공급이 가능한 땅과 빨리 공급할 수 있는 땅은 다르다.

서울시는 신속통합기획으로 정비사업 초기의 시간을 줄여왔다. 평균 21년에 이르던 사업기간을 12년까지 줄이겠다는 계획하에 멈춰섰던 서울시내 재개발 재건축 사업을 재가동시켰다. 그런데 어렵게 출발한 사업이 정작 중앙정부의 규제지역 지정과 금융·거래 규제를 만나 다시 느려진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여당은 또다시 500가구 이하 정비사업의 구역지정 권한을 서울시에서 구청장에게 넘기는 방안을 추진하기로 했다. 일선 구청이 사업권한을 갖게되면 과연 속도가 지금보다 더 빨라질까. 정비사업은 단지 하나를 짓는 일이 아니다. 교통과 학교, 공원과 기반시설을 함께 조정해야 하는 도시계획이다. 자치구의 이해를 넘어 광역적 조정이 필요한 이유다. 그런데 이러한 조정이 서울시 없이 구청 단위에서 차질없이 이뤄질까? 서울시는 원활하고 신속한 재개발 재건축 사업추진을 위해 우회해야 할 장애물이 아니라 오히려 사업추진을 실질적으로 지원할 수 있는 공급의 파트너다.

주택공급에는 세 명의 선수가 모두 필요하다. 중앙정부와 지방정부, 민간이다. 정부는 금융과 세제 등의 제도를 정비하고, 지방정부는 계획과 인허가의 길을 열고, 민간은 자금과 사업을 움직여야 한다. 어느 한 선수를 벤치에 앉혀 놓고서는 경기에서 이길 수 없다.

영국도 무조건 규제를 푸는 것은 아니다. 그레이벨트 개발에는 저렴주택과 교통·학교 등 기반시설을 확보하도록 ‘골든 룰(Golden Rules)’을 붙였다. 핵심은 규제 철폐가 아니다. 공급을 막는 실제 병목을 찾아 풀되 지켜야 할 공공성은 분명히 하는 것이다.

주택공급은 정부가 숫자를 발표한다고 만들어지지 않는다. 공급에 참여하는 파트너를 의심하면서 공급을 늘릴 수는 없다. 엑셀과 브레이크를 동시에 밟는 자동차는 엔진 소리만 요란할 뿐 앞으로 가지 않는다.


김현아 가천대 초빙교수(전 국회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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