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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매일 쓰는 단어‘빵’. 너무 익숙해서 순우리말처럼 느껴지지만 이 단어는 포르투갈어 ‘pão(팡)’에서 왔다. 16세기 포르투갈 선교사들이 일본을 거쳐 조선에 전파하면서 한반도에 뿌리를 내렸다. 우리 식탁에서 포르투갈어 어원을 가진 대표적인 음식이 빵이다. 빵의 원료는 밀이다.
밀이 우리 언어에 이렇게 스며든 것처럼 밀은 인류 문명 깊숙이 파고들었다. 기원전 9600년 무렵 지금의 터키, 시리아, 이라크, 이란에 걸친 ‘비옥한 초승달 지대’. 인류는 그곳에서 야생 밀을 처음으로 경작하기 시작했다. 인류가 가장 오래 재배해온 작물 중 하나다. 밀이 자라면서 인류는 이동을 멈추고 정착했다. 정착은 잉여를 만들었고, 잉여는 도시를, 도시는 문명을 만들었다. 밀 한 알이 문명의 씨앗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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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이 인류에게 갖는 의미
시카고상품거래소 건물 정면, 두 개의 조각상. 옥수수를 든 네이티브 아메리칸 옆에 선 메소포타미아인은 밀을 들고 있다. 인류 문명의 시작과 현대 선물시장, 그 두 시대를 이어주는 곡물이 밀이라는 의미다.
오늘날 세계 인구의 약 30%가 밀을 주식으로 먹는다. 쌀을 주식으로 하는 인구(약 34%)보다는 약간 적지만, 칼로리 공급 기준으로는 밀이 세계 최대 곡물이다. FAO에 따르면 전 세계 칼로리 섭취의 약 20%가 밀에서 나온다. 옥수수의 상당량이 사료와 에탄올로 빠져나가는 것과 달리 밀은 대부분 사람이 직접 먹기 때문이다. 빵, 파스타, 면, 과자, 술. 밀이 빚어낸 음식의 목록은 인류의 문화사다.
wheat는 weed에서 왔다? — 잘못된 속설
밀에 관한 흥미로운 속설이 하나 있다. ‘wheat(밀)’와 ‘weed(잡초)’가 같은 어원이라는 이야기다. 밀이 어디서나 잘 자라는 강인한 생명력 때문에 잡초와 어원이 같다는 것인데, 사실과 다르다. wheat의 어원은 인도유럽조어에서 파생된 것으로 ‘흰색의 것’이라는 의미다. white(흰색)와 같은 어근이다. 익은 밀이삭의 연한 금빛, 도정한 밀가루의 흰색이 이름의 출발점이다. 반면 weed는 고대 영어 weod에서 유래한 전혀 다른 어근이다. 두 단어는 발음이 비슷할 뿐, 어원적으로 아무 관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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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밀이 겨울을 필요로 하는 이유
밀에는 파종 시기에 따라 봄밀과 겨울밀이 있다. 겨울밀은 차가운 겨울을 반드시 거쳐야만 꽃을 피우고 이삭을 맺을 수 있다. 이 현상을 춘화처리(vernalization, 春化處理)라고 한다. VRN1, VRN2, FT 세 가지 유전자가 저온을 인지하고 개화 신호를 조율한다. 저온 자극이 없으면 이 유전자들이 작동하지 않아 이삭을 맺지 못한다. 겨울밀에게 추위는 위협이 아니라 조건이다. 차가운 겨울을 버텨낸 밀만이 봄에 이삭을 올릴 자격을 얻는다. 시련을 거쳐야 결실을 맺는다는 이야기가 식물에도 새겨져 있는 셈이다.
겨울밀은 세계 밀 생산의 약 70~75%를 차지한다. 봄밀은 캐나다·러시아·카자흐스탄 등 혹한의 지역에서 봄에 파종해 여름에 수확한다. 단백질 함량이 높아 강력분 원료로 선호된다.
맥(麥)의 세계 — 소맥과 대맥, 그리고 맥주
한자 ‘맥(麥)’은 보리를 뜻한다. 밀은 소맥(小麥), 보리는 대맥(大麥). 맥주(麥酒)의 ‘맥’이 보리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런데 맥주의 원료는 그냥 보리가 아니다. 두줄보리(이조맥)가 정통 맥주의 주원료다. 낟알이 두 줄로 배열되는 두줄보리는 전분 함량이 높고 단백질 함량이 낮아 깨끗하고 풍부한 맛을 만들어낸다.
반면 우리나라에서 주로 재배되는 여섯줄보리(육조맥)는 단백질 함량이 높고 전분 함량이 낮다. 맥주 원료로 사용하면 단백질 과다로 맥아 품질이 떨어지고, 결과적으로 맥주의 맛과 향이 저하된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한국 맥주가 오랫동안 ‘밍밍하다’는 평을 받아온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여기에 있다. 두줄보리 대신 여섯줄보리에 의존해온 구조적 한계가 맥주 품질에 영향을 미친 것이다.
경질맥과 연질맥 — 밀 글루텐이 결정한다
밀은 단단함의 정도에 따라 경질맥과 연질맥으로 나뉜다. 이 경도를 결정하는 것이 밀 단백질, 즉 글루텐이다. 글루텐은 글리아딘과 글루테닌 두 단백질이 결합한 것으로, 물과 만나면 점탄성 있는 망상 구조를 형성한다. 빵 반죽이 늘어나고 부풀어 오르는 것이 이 덕분이다.
여기서 잠깐 짚고 넘어가야 할 혼동이 있다. 옥수수에도 ‘글루텐(corn gluten)’이라는 용어가 쓰인다. 그런데 옥수수 글루텐의 주성분은 제인(zein)이라는 단백질로, 밀 글루텐처럼 점탄성 구조를 만들지 못한다. 같은 이름 때문에 종종 혼동하지만, 두 물질은 구조와 기능이 근본적으로 다르다. 시중에서 ‘글루텐 프리’ 제품이라고 표시된 것은 밀·보리·호밀의 글루텐을 기준으로 한다. 옥수수와 쌀 기반 제품은 이 글루텐과 무관하다.
글루텐 함량에 따라 밀가루는 용도가 나뉜다. 단백질 함량이 낮은(7~9%) 연질맥으로 만드는 박력분은 과자, 케이크, 튀김용이다. 중간 단백질(9~11%)의 중력분은 국수, 만두, 다목적용이다. 단백질이 높은(11~13%) 경질맥의 강력분은 식빵, 피자, 베이글용이다. 가장 단단한 듀럼밀은 단백질 함량이 12~14%로 파스타, 스파게티, 마카로니의 원료다. 매우 단단해 일반 제분 장비로는 가공이 어렵고, 국내 제분사들의 듀럼밀 전용 설비 도입도 늦은 편이었다.
국산 밀의 현실 — 그리고 앉은뱅이밀 이야기
국내 밀 자급률은 약 0.8%. 연간 국내 밀 소비량은 약 400만 톤인데, 국산 생산량은 3만~4만t 수준이다. 6ㆍ25 전쟁 이후 미국의 잉여 농산물 원조가 시작됐다. 값싼 미국산 밀이 대량으로 들어오면서 국내 밀 재배는 경제성을 잃었다. 1984년 정부의 밀 수매 중단 이후 생산기반이 급격히 무너지며 60년 넘게 수입 의존 구조가 고착됐다.
여기서 놀라운 사실 하나. 오늘날 세계 밀 재배 면적의 25% 이상을 차지하는 고수확 품종의 유전적 뿌리가 한국의 재래종 밀인 ‘앉은뱅이밀’에 있다. 키가 작고 수확량이 많은 이 품종을 미국 농학자 노먼 볼로그(Norman Borlaug)가 교잡해 ‘소노라 64호’를 만들었고, 이 품종이 단위 면적당 생산량을 기존의 4배 이상으로 끌어올리며 1960~70년대 녹색혁명을 이끌었다. 볼로그는 이 공로로 1970년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세계인의 기아를 해방시킨 밀 혁명의 씨앗이 한반도에 있었던 것이다. 앉은뱅이밀은 2013년 슬로푸드 국제재단의 ‘맛의 방주’에 등재됐으며, 키가 작아 기계화에 유리하고 병해에 강한 특성이 현대 품종 개량에도 여전히 주목받고 있다.
밀의 제품 스펙트럼 — 제분에서 소재까지
수입 원맥은 제분 공장으로 들어간다. 제분은 밀의 배유(전분ㆍ단백질)와 껍질(밀기울), 씨눈(밀배아)을 분리하는 과정이다. 분리된 밀기울은 식이섬유 원료이자 가축 사료다. 밀배아는 비타민 E, 엽산, 아연, 필수 지방산이 풍부한 기능성 소재다. 밀가루에서 글루텐을 분리하면 활성 글루텐이 된다. 제빵 품질을 높이는 첨가물로 쓰이고, 식물성 단백질 원료로도 활용된다. 밀 전분은 식품 첨가물이자 제지·섬유·의약품 부형제 원료다. 유럽에서는 밀 기반 바이오에탄올도 상당한 비중을 차지한다. 하나의 낟알이 빵이 되고, 파스타가 되고, 비타민제가 되고, 에탄올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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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맥과 우리 기업 - 국내 산업 지도와 미래 전망
밀이 항구에 닿는 순간, 우리나라 식품 산업의 가장 깊은 뿌리 중 하나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국내 밀가루 시장은 연간 약 180만t, 1조 5000억원 규모다. 수입 원맥 기준으로는 연간 약 400만t. 단일 품목으로는 국내 수입 곡물 중 대두, 옥수수에 이어 세 번째 규모다.
항구에서 제분 공장까지
국내 수입 원맥은 주로 인천·부산·군산·포항을 통해 들어온다. 미국, 호주, 캐나다 세 나라가 수입량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미국산은 강력분용 경질 춘맥(Hard Red Spring)과 연질 동맥(Soft White)이 주류이고, 호주산은 글루텐 함량이 안정적인 중력분ㆍ강력분용, 캐나다산은 최고 품질의 강력분용으로 사용된다.
원맥을 미리 확정 가격에 사들이는 선도 계약과 시카고상품거래소 헤징은 여기서도 구매 담당자의 핵심 역할이다. 2022년 러시아ㆍ우크라이나 전쟁으로 흑해 밀 공급이 막히자 국내 제분 업체들이 받은 충격은 컸다. 공급망 다변화의 중요성이 이 사건으로 다시 한번 각인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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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분 업계 — 빅3와 중견 전문사들
국내 제분 업계는 대형사와 중견 전문사들로 구성된다.
대한제분이 생산량 기준 1위이며, CJ제일제당이 그 뒤를 바짝 쫓는다. 대한제분은 1952년 설립된 제분 전문 업체로, ‘곰표’ 브랜드가 밀가루 시장의 상징이다. 사조동아원은 2008년 동아제분과 합병 후 2017년 한국제분까지 흡수합병하며 제분 사업을 통합했다. 부산ㆍ인천ㆍ당진에 공장을 두고 제분과 사료 사업을 병행한다. CJ제일제당은 식품 대기업의 브랜드 파워와 전국 유통망을 무기로, 삼양사는 전분당 사업과 함께 제분 사업에서도 안정적 입지를 유지한다. 대선제분은 오뚜기가 최대주주로, 충남 아산 공장 중심의 제분 전문사다. 삼화제분ㆍ한탑은 지역 기반의 중견 제분사다.
빵을 주식으로 먹는 서양 제분사들은 주로 자국산 한두 품종을 단순 배합해 밀가루를 만든다. 반면 한국과 일본의 제분사들은 미국산, 호주산, 캐나다산 등 산지와 등급이 전혀 다른 원맥을 복잡하게 조합한다. 봉지라면에 쓰이는 배합과 컵라면 배합이 다르고 식빵용과 과자용 배합이 다르고, 브랜드마다 배합비가 다르다. 같은 강력분이라도 쫄깃한 식감을 원하는지, 부드러운 팽창을 원하는지에 따라 원맥 배합표가 달라진다. 한국과 일본은 아시아에서 가장 정교한 원맥 블렌딩 문화를 공유하는 나라다. 미국 밀 수출위원회(USW)가 한국의 블렌딩 기술을 동남아시아 제분사들에게 선진 사례로 소개할 만큼 세계적으로 주목받는다. 수입 원맥 의존이라는 약점이 오히려 다양한 원맥을 자유롭게 배합하는 기술력으로 역전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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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품 가공 — 밀이 식탁에 오르기까지
제분사에서 나온 밀가루는 수많은 식품 기업으로 흘러간다. 면류 시장에서는 농심, 삼양식품, 오뚜기, 팔도가 라면 시장을 4분하고 있다. 2024년 기준 한국인의 1인당 라면 소비량은 약 79.2개로 세계 2위다. 1위는 베트남(81개)으로 2021년 이전까지는 한국이 세계 1위였다. 4~5일에 한 번 라면을 먹는 나라. 2025년 한국 라면 수출은 단일 품목 기준 사상 처음 15억 달러를 돌파했다. 국내 소비만이 아니라 수출까지 폭발적으로 성장하면서, 라면 4사의 밀가루 수요는 구조적으로 늘고 있다.
제빵ㆍ제과 시장에서는 상미당홀딩스(파리바게뜨ㆍ삼립)이 압도적 1위다. 상미당홀딩스는 자체 제분 역량(밀다원)까지 보유, 원료 수직계열화 구조를 갖추고 있다. CJ푸드빌(뚜레쥬르), 신라명과 등이 뒤를 잇는다. HMR(가정간편식) 시장의 성장도 밀 수요를 키우고 있다. CJ제일제당, 동원F&B, 오뚜기 등이 만두, 냉동 피자, 냉동 면류 시장에서 격돌한다. 밀가루는 이 모든 제품의 공통 원료다.
글루텐ㆍ밀배아 — 보이지 않는 소재 산업
밀가루 너머의 세계도 있다. 밀에서 추출한 활성 글루텐은 제빵 개량제로 쓰이고 식물성 단백질 소재로도 주목받고 있다. 밀배아는 소량이지만 부가가치가 높다. 비타민 E 함량이 높고 오메가-3 지방산과 엽산이 풍부해 건강기능식품 원료로 각광받는다. 한미약품·종근당건강·일동제약 등 건기식 업체들이 밀배아 추출 제품을 판매하고 있다.
식량 안보 — 밀이 드러낸 우리의 민낯
2022년 러시아ㆍ우크라이나 전쟁으로 두 나라가 담당하던 전 세계 밀 수출의 약 28%가 흔들렸다. 시카고상품거래소 밀 선물 가격은 수주 만에 60% 이상 급등했다. 이집트, 튀니지, 레바논 등 밀 수입 의존국들은 식량 위기에 직면했다. 한국의 충격은 달랐다. 흑해산 밀 비중이 낮은 덕에 공급 단절 위험은 작았지만, 가격 급등은 피하지 못했다. 라면, 빵, 과자 가격이 줄줄이 올랐다. 자급률 0.8%의 현실이 얼마나 취약한지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이후 정부는 전략작물 직불제를 강화하고 원맥 비축 물량 확대를 추진했다. 그러나 수입 의존 구조는 단기에 바뀌지 않는다. 밀은 쌀과 달리 이모작 체계 재건, 품종 개발, 건조·저장 인프라 구축까지 선결 과제가 많다.
미래 전망 — 문명의 연금술사가 맞닥뜨린 세 가지 과제
첫째는 기후변화와 주산지 불안정이다. 기온 상승은 밀 생산 적지를 고위도로 밀어올린다. 주요 산지인 북미, 유럽, 호주의 작황 변동성을 키우고 있다. 공급망 리스크는 지정학만이 아니라 기후라는 변수까지 더해졌다.
둘째는 글루텐 프리 트렌드와 소비 구조 변화다. 글루텐 불내증(셀리악병)과 민감성이 알려지면서 쌀, 타피오카, 아몬드 가루 기반 대체 제품이 성장하고 있다. 아직 전체 소비에서 큰 비중은 아니지만 프리미엄 소비층에서의 이탈은 실질적이다.
셋째는 국산 밀 르네상스의 가능성이다. 앉은뱅이밀을 비롯한 재래종 밀의 재조명, 우리밀살리기운동, 일부 제빵ㆍ제면 업체들의 국산 밀 프리미엄 제품 출시가 이어지고 있다. 녹색혁명의 씨앗을 품었던 한반도의 밀이 다시 제 땅에서 자랄 가능성. 자급률 0.8%가 1%, 2%로 올라가는 과정은 더디겠지만 방향은 분명히 있다.
기원전 9600년 비옥한 초승달 지대의 씨앗 하나가 문명을 만들었다. 그 씨앗은 지금 우리 식탁의 빵이 되고, 라면이 되고, 비타민제가 된다. ‘빵’이라는 한 단어 안에 포르투갈 선교사의 여정과 1만 년의 역사가 담겨 있다. 그리고 녹색혁명의 씨앗 앉은뱅이밀 안에는 한반도의 지혜가 담겨 있다. 문명을 빚은 연금술사는 오늘도 조용히 우리 곁에 있다.
다음 회는 사탕수수다. 설탕이 된 태양 에너지, 그 달콤한 연금술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글ㆍ그래픽=김수철 가치구매 연구소(kvpi.co.kr) 대표
김수철 가치구매연구소 대표는 곡물ㆍ바이오 카테고리 구매전략 전문가로, 자문ㆍ저술ㆍ강연ㆍ멘토링을 통해 구매를 주제로 기업 경쟁력을 높이는 방법론을 다양하게 모색하고 있다. 대한경제 객원 칼럼니스트로 활동하며 현장에서 축적한 구매 인사이트를 링크드인(LinkedIn) ‘구매단상’과 브런치(Brunch)에 나누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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