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경제=박재영 기자] 수요일 오전 10시. 출근시간이 한참 지난 지하철 2호선 을지로입구역 지하통로에 사람들이 몰려 있다. 팝업 스토어라도 열었나 들여다보니 K팝 그룹 ‘빅뱅(BIGBANG)’ 데뷔 20주년을 기념하는 특별 전시회를 기다리는 행렬이다. 데뷔 20주년 기념 티셔츠를 입은 팬, 군복 차림의 청년, 히잡을 쓴 무리까지 국내외 팬층이 두터운 만큼 이날 찾은 방문객도 제각각이다.
40년간 잠들어 있던 지하 비밀 공간이 300m짜리 선형 문화공간으로 다시 태어났다. 시청역과 을지로입구역 335m 길이 터널은 40년간 전기실 등을 점검하러 다니는 통로로만 사용됐다. 서울시는 지난 2023년 ‘시민 탐험대’를 모집해 이 통로를 탐사한 이후 가능성을 확인하고, 환기ㆍ소음 등을 해결해 지하 터널을 ‘K-문화 스테이션’으로 재탄생시켰다. 기획 과정에서 원형 구조와 벽면은 그대로 남겨 본래 공간의 존재감을 드러내기로 했다. 콘크리트와 철골 구조로 둘러싸인 터널에서 미세한 지하철 진동이 울리면 지하철 밑 비밀 공간을 탐사하는 묘한 기분을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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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청역 K-문화 스테이션 빅뱅 데뷔 20주년 기념 전시 'COSMOS'를 구경하는 시민들/사진=안윤수 기자 ays77@ |
개장 시간이 되니 약 70명의 방문객이 스테이션에 입장한다. 한 회차에 평일 70∼80명, 주말 100∼120명을 수용하고 있다. 개장 첫 주에는 일주일치 모든 회차가 매진됐다. 입구부터 붉은 벽면이 눈에 들어온다. 운영사 ‘크리에이티브 멋’은 우주가 팽창하는 빅뱅의 증거인 ‘적색편이(赤色偏移, 물체가 내는 빛의 파장이 늘어나 보이는 현상)’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전시회 전체 테마를 붉은색으로 정했다. 입구 바로 앞에서는 홀로그램으로 구현한 빅뱅 멤버들이 인사를 건넨다. 국내 팬들은 미디어아트에 익숙해 큰 반응이 없지만, 해외 팬들에게는 홀로그램에 대한 반응이 뜨겁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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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문화 스테이션 'COSMOS' 리릭존 내부/사진=안윤수 기자 ays77@ |
짧은 암막 구간을 지나면 사방이 빅뱅 노래 가사로 둘러싸인 ‘리릭존(Lyric zone)’이 나온다. 일상 공간인 지하철역에서 전시 공간으로 들어간다는 느낌을 단절감으로 구현했다. 걸음을 옮기면 2000년대 감성을 느낄 수 있는 ‘메모리존’이다. YG에서 제공한 빅뱅 멤버들의 미공개 사진들이 천막에 걸려 있다. 오는 15일부터 시작되는 페이즈2에는 새로운 미공개 사진이 공개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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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음존에서 빅뱅 음악을 즐기는 관람객들/사진=안윤수 기자 ays77@ |
이어지는 공간은 빅뱅 노래를 감상하는 ‘AI청음존’이다. 헤드셋을 착용하면 지하 터널의 어둠 속에서 음악을 즐길 수 있다. 콘크리트 벽면에 펼쳐지는 빅뱅 노래를 듣고 AI가 창작한 음파와 그래픽이 몰입도를 높인다.
청음존을 지나면 각도에 따라 달리 보이는 렌티큘러 기법을 활용한 포토존이 나온다. 렌티큘러로 공개되는 사진들도 모두 이번 전시에서 최초 공개된 사진이다. 팬들은 다양한 모습의 빅뱅을 보기 위해 연신 좌우로 몸을 흔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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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관람객이 포토존에서 직접 챙겨온 응원봉과 함께 사진을 남기고 있다/사진=박재영 기자 |
다음은 노란 응원봉으로 가득한 포토존. 빅뱅은 K팝 최초로 응원봉 문화가 시작된 팬덤이다. 왕관모양 ‘터보 옐로우’ 응원봉을 모아 놓으니 마치 꽃밭처럼 보인다. 중간 중간 2m가량 돼 보이는 큰 응원봉이 있는데, 그 속을 촬영해보면 각 응원봉마다 다른 빅뱅 로고가 나온다. 많은 팬이 대형 응원봉 속 로고를 보기 위해 까치발을 들고 사진을 찍었다. 직접 가져온 응원봉과 인증샷을 남기는 이들도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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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VR 체험용 기기. 착용하면 빅뱅 멤버들이 눈 앞에 나와 신곡 BiiG에 맞춰 춤과 노래를 선보인다/사진=박재영 기자 |
전시에서 가장 몰입도 높은 경험은 단연 VR 체험이었다. VR 기기가 놓여 있는 의자에 앉으면 직원들이 위생용 아이마스크를 건네준다. 착용을 마치면 주변 시야는 곧 가상공간으로 변한다. 내 팔도 무지개색 장갑을 낀 것처럼 보인다. 곧이어 빅뱅 신곡 ‘BiiiG’가 들린다. 멤버 셋이 가상공간에서 춤을 추는데 놀랄 정도로 실제 공연을 보는 기분이 든다. 한번은 멤버 지드래곤이 너무 가까이 다가와 놀라기도 했다. 얼마나 가까운지 손을 뻗어보니 손끝이 닿는 거리가 멤버가 가장 가까이 왔을 때 거리와 비슷했다.
흥분된 마음을 안고 넘어간 마지막 전시는 빅뱅과 팬을 사진으로 연결하는 공간이다. 팬들은 스타와의 추억을 사진으로 기록한다. 하지만 반대로 스타가 나를 찍어주는 경험은 흔치 않다.‘추억의 사진으로 완성되는 COSMOS’라는 이름의 마지막 전시는 팬과 스타의 역할을 바꿔보자는 구상에서 시작됐다. 십수대 모니터에는 팬들이 직접 찍고 업로드한 사진이 돌아가고 있다. 그런데 몇몇 화면은 전시를 즐기는 팬들의 모습이 녹화되고 있다. 그리고 그 화면 바로 아래는 빅뱅 멤버들이 차례로 카메라를 들고 나와 팬들을 사진으로 기록한다.
전시장을 나가는 길에 들어서야 조명과 어둠에서 벗어날 수 있다. 잠시 잊고 있었지만 여기가 지하철 밑 지하 터널이었다는 사실을 알리듯 희미한 지하철 소리가 들려온다. 전시의 내용뿐 아니라 전시 공간의 구조와 동선도 관람객에게 새로운 경험을 선사하는 요소로 작용한다. 서울광장 지하 13m, 길이 330m의 선형 터널은 이번 전시가 끝나고도 또 다른 콘텐츠로 시민들을 찾아갈 예정이다.
5년간 K-문화 스테이션을 운영하기로 한 크리에이티브 멋 관계자는 “첫 전시는 빅뱅이지만 K팝에 국한돼 있지는 않다. 다만 지금 K팝 아티스트들이 좋은 퍼포먼스를 보이고 있기 때문에 선택한 것”이라며 “앞으로는 애니메이션 등 다양한 주제를 선보일 계획”이라고 말했다. 지하 터널을 채울 다음 콘텐츠는 무엇일까. 시청역 퇴근길 재밋거리가 하나 늘었다.
박재영 기자 yo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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