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경제=김호윤 기자] 화장품과 미용 시술에 머물던 안티에이징 산업은 이제 세포와 유전자 단위에서 생체 나이 자체를 되돌리는 ‘역노화(Aging Reversal)’ 신약 개발 경쟁으로 판이 커졌다. 노화를 피할 수 없는 자연 현상이 아니라 예방하고 치료할 수 있는 ‘질병’으로 보는 패러다임 전환이 전 세계 제약·바이오 업계를 흔들고 있다.
6일 업계에 따르면 올해는 역노화 산업에서 상징적인 한 해로 기록될 전망이다. 노화 자체를 표적으로 삼은 치료제가 사상 처음으로 사람 몸에 투여됐기 때문이다.
미국 바이오텍 라이프바이오사이언스는 올해 1월 미국 식품의약국(FDA)으로부터 후성유전 리프로그래밍 치료제 ‘ER-100’의 임상시험계획(IND) 승인을 받아 3월 첫 환자 투약을 시작했다.
녹내장으로 손상된 시신경세포를 ‘어린 상태’로 되돌리는 것이 핵심으로, 생체 나이를 거꾸로 돌릴 수 있는 유전자 3종을 인체에 무해한 바이러스에 실어 환자의 망막 신경절 세포에 주입하는 방식이다. 한때 실리콘밸리 억만장자들의 사적인 관심사로 여겨지던 영역이 글로벌 제약산업의 정식 연구개발(R&D) 파이프라인으로 편입됐다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영국의 장수산업 전문 플랫폼 롱제비티 테크놀로지 집계에 따르면 올해 1분기 전 세계 항노화 바이오테크로 유입된 투자금은 37억4000만달러(약 5조5000억원)로 전년 동기 대비 56% 급증했다. 연간으로는 90억달러(약 13조3000억원)에 이를 것으로 전망된다. 비영리 연구단체 에이징 바이오테크 인포 집계로는 이 분야에서 빅파마가 체결한 누적 공시 딜 규모가 벌써 110억달러(약 16조3000억원)를 넘어섰다.
역노화 신약 개발의 상징적 기업으로는 단연 알토스랩스가 꼽힌다. 아마존 창업자 제프 베이조스가 약 30억달러(약 4조원)를 투자하며 전 세계의 이목을 끈 이 회사는 늙은 세포를 젊은 세포로 되돌리는 ‘세포 리프로그래밍’ 기술을 기반으로 노화역행 치료제를 개발하고 있다. 유도만능줄기세포(iPSC) 연구로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은 야마나카 신야 교수를 고문으로 영입하는 등 세계 최고 수준의 유전학자와 생물학자들을 대거 끌어모았다.
암호화폐 거래소 코인베이스 공동창업자 브라이언 암스트롱이 세운 스타트업 뉴리밋도 무섭게 성장하고 있다. 간세포의 노화를 되돌리는 기술을 앞세운 이 회사는 최근 4억3500만달러(약 6000억원) 규모의 시리즈C 투자를 유치하며 기업가치를 31억달러로 평가받았다. 아직 시판 제품은 없지만 2027년 임상 진입을 목표로 인간 간세포 노화 역전 효과를 실험실 단계에서 확인한 상태다.
전통 제약 강자들의 움직이고 있다. 일라이릴리는 지난 3월 AI 신약개발 기업 인실리코메디신과 최대 27억5000만달러(약 4조1000억원) 규모의 파트너십을 체결했다. 노화 생물학 기반 인공지능 플랫폼이 발굴한 전임상 단계의 경구용 신약 후보물질에 대해 선급금 1억1500만달러를 지급하고 글로벌 독점 라이선스를 확보한 딜로, 올해 이 분야 최대 규모 계약으로 꼽힌다. 노바티스는 아예 노화·재생의학(DARe) 사업부를 신설하고 항노화 바이오테크 바이오에이지와 최대 5억5000만달러(약 8200억원) 규모의 협업을 진행 중이다.
세계적으로 노화를 ‘질병’으로 재정의하는 흐름이 확산하면서, 국내 제약바이오 기업들도 세포와 유전자를 활용한 역노화 신약 개발에 속속 뛰어들고 있다. 파산한 미국 바이오텍의 핵심 기술을 통째로 인수하거나, 기존 세포치료제·비만치료제 파이프라인을 항노화로 확장하는 등 저마다 다른 전략으로 승부수를 던지고 있다.
가장 공격적인 행보를 보이는 곳은 대웅제약이다. 대웅제약은 미국 바이오기업 턴 바이오테크놀로지스의 파산 경매를 통해 핵심 기술자산인 ‘ERA’ 플랫폼의 지식재산권과 자산 일체를 인수했다. mRNA 형태의 리프로그래밍 인자를 세포에 전달해, 세포 고유의 정체성은 유지하면서 노화된 기능만 선별적으로 회복시키는 ‘부분 리프로그래밍’ 기술이다. 대웅제약은 안과와 청각 질환 등 기능이 점진적으로 소실되는 노화 관련 질환 전반으로 적용 범위를 넓힐 계획이다. 최근에는 턴 바이오로부터 인수한 지질나노입자(LNP) 전달 플랫폼 ‘eTurna’의 핵심 원천기술인 이온화지질 관련 기술이 미국 특허청(USPTO)으로부터 특허 등록 결정을 통보받기도 했다.
차바이오텍은 여성의 생식기관 노화를 정면으로 겨냥하고 있다. 세계 최대 규모의 세포 라이브러리와 체세포 복제 줄기세포 원천 기술을 보유한 이 회사는 조기난소부전과 자궁내막 질환을 타깃으로 자가 세포치료제 ‘CHAUM-101’과 동종 세포치료제 ‘CHAMSC-201’을 개발 중이다. 차바이오텍은 이미 2014년 일본 도쿄 현지 클리닉에서 역노화 재생의료 시술을 진행하고 있으며, 지난해 9월에는 보건복지부가 주관하는 455억원 규모의 ‘글로벌 K-셀 뱅크·라이브러리 구축’ 사업 주관기관으로 선정됐다.
한미약품은 비만 치료제 다음 성장 동력으로 항노화를 낙점했다. GLP-1 계열 비만 치료제가 염증과 신경염증을 줄이는 경로를 통해 노화 지연 효과까지 낼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해, 인크레틴 계열 약물의 임상 프로토콜에 항노화 효능 평가 항목을 반영하고 자체 생체 나이 측정 도구도 개발 중이다. 동종 줄기세포 치료제 강자 메디포스트 역시 2023년 항노화연구팀을 신설한 뒤 제대혈 혈장이 노화 관련 유전자 발현을 유의미하게 감소시킨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하며 피부 재생 및 항노화 신사업으로 영토를 넓히고 있다.
물론 낙관론만 있는 것은 아니다. 1세대 세놀리틱(노화세포 제거) 기업 유니티바이오테크놀로지는 시리즈C까지 2억달러를 조달했지만 임상 실패로 결국 사업을 접었다. 세포를 조작해 노화를 되돌리는 접근법인 만큼 장기적인 안전성 검증에는 상당한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고, 통상 신약이 임상 1상에 진입한 뒤 시판 허가를 받기까지 10년 안팎이 소요된다는 점을 감안하면 일반 환자가 실제로 이 치료법을 접할 수 있는 시점은 2030년대 중후반 이후가 될 가능성이 크다.
한국의 경우 경쟁력 확보를 위한 과제도 적지 않다. 초기 투자 부족과 컨트롤타워 부재, 분절된 정책 등이 발목을 잡고 있다는 지적이다. 실제로 삼성의 항노화 연구는 과거 구글보다 앞섰던 것으로 알려졌으나, 후속 투자와 임상 전략의 공백 속에 글로벌 선두 기업들에 뒤처졌다는 평가를 받는다.
제약업계 관계자는 “노화 표적 신약은 이제 가능성 검증 단계를 지나 치료 카테고리로 정착하는 단계에 들어섰다”며 “라이프바이오사이언스 ER-100의 1상 첫 시그널, 릴리-인실리코 후보물질의 IND 진입 등 향후 1~2년 안에 줄지어 나올 임상 데이터가 GLP-1 이후 빅파마 성장 축의 향방을 결정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김호윤 기자 khy2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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