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가 도와줘서 돈벌어”
중동전쟁 속에도 담합 지속
[대한경제=이승윤 기자] 국내 석유화학업체들이 5년 넘게 16조원대 제품 가격을 담합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검찰이 수사한 담합 사건 가운데 역대 최대 규모다.
일부 업체는 중동전쟁으로 원료 수급과 물가가 불안해져 정부가 지원에 나섰는데도 가격 담합을 이어간 것으로 드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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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픽: 서울중앙지검 제공 |
서울중앙지검 공정거래조사부(부장검사 나희석)는 1일 LG화학ㆍ애경케미칼ㆍOCIㆍ롯데정밀화학ㆍPKCㆍ유니드 등 석유화학업체 6곳과 전ㆍ현직 대표이사를 포함한 임직원 37명을 공정거래법 위반 혐의로 기소했다고 밝혔다.
LG화학 사업부장을 지낸 황모씨와 PKC 영업본부장을 지낸 배모씨는 구속 기소됐다. 김유신 OCI 대표이사 겸 부회장과 장영수 전 PKC 대표이사 등 나머지 35명은 불구속 기소됐다. 당초 수사 대상에 올랐던 한화솔루션은 기소 대상에서는 제외됐다.
검찰에 따르면 이들은 2021년 1월부터 올해 4월까지 폴리염화비닐(PVC), 가소제, 가성소다, 염산, 하이포, TDI, ECH, 염소 등 8개 품목의 공급가격 변동 폭과 시기를 합의하고 거래처 입찰 가격을 담합한 혐의를 받는다.
담합 관련 매출액 규모는 16조3961억원으로 집계됐다. 앞서 검찰이 수사한 전분당 담합(10조1520억원), 밀가루 담합(5조9913억원), 설탕 담합(3조2715억원) 규모를 크게 웃돈다.
담합은 주로 팀장급 모임에서 가격 조정 시기와 폭을 정한 뒤 상급자에게 보고하는 방식으로 이뤄졌다. 대형 거래처 입찰에서는 각 회사의 시장점유율을 유지하도록 낙찰업체와 투찰가격을 미리 정했다. 심지어 가격 인상 공문을 보내는 순서까지 조율해 담합 사실을 숨기려 했다는 게 검찰의 설명이다.
게다가 이들은 담당자가 바뀌면 후임자를 경쟁사에 소개하고, 일부 업체는 경쟁사와의 연락을 전담하는 직원을 따로 두기도 했다. 대표이사 등 고위 임원도 가격 인상을 지시하거나 합의를 관철하는 데 관여한 것으로 조사됐다.
검찰이 공개한 녹취에는 “PVC는 형하고 나하고 마음먹었으니까 그렇게 한다”, “우리는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이 가는 거야. 형 사랑해요” 등 임원들 간의 대화가 담겼다. 가격을 올릴 이유가 없다는 점을 알면서도 인상을 추진한 정황도 포착됐다.
담합을 감추려는 증거인멸 시도도 확인됐다. 검찰은 메시지 대화방과 이메일을 삭제하라는 지시, 압수수색 소식을 들은 전직 임원이 휴대전화 교체를 논의한 대화 등을 확보했다.
특히 검찰은 일부 업체가 미국ㆍ이란 전쟁 이후 국제 석유제품 가격이 급등한 위기를 손익 개선의 기회로 삼았다고 지적했다. 정부가 올해 4∼6월 생산 안정을 위해 일부 석유화학사에 원재료 구입 지원비 약 1465억원을 지급했지만, 지원 논의가 진행되는 동안에도 담합이 이어졌다는 것이다.
수익 증가를 두고 한 업체 관계자는 “트럼프가 도와줘서 그렇다”, “흑자 전환했다. 한 턱 내겠다”라고 말한 것으로 조사됐다.
담합 대상은 건축자재ㆍ전선 피복ㆍ반도체ㆍ수처리 등에 쓰이는 기초소재다. 검찰은 원재료 구매 단가 상승이 관련 산업의 제조원가와 최종 제품 가격을 연쇄적으로 끌어올려 소비자에게 피해가 전가됐다고 설명했다.
앞서 검찰은 지난 8월 7개 업체 등을 압수수색하며 강제수사에 나섰고, 공정거래위원회에 두 차례 고발을 요청한 뒤 두 달 만에 기소했다.
한편 오는 2일부터는 검찰청 폐지에 따라 그동안 검찰이 맡았던 공정거래 사건 수사는 행정안전부 소속 중대범죄수사청으로 넘어간다.
이승윤 기자 lees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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