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바로가기
“선진국에 없는 과도한 처벌”… 상법 개정 ‘당근책’으로 꺼낸 카드
페이스북 트위터 네이버
기사입력 2024-06-25 05:00:18   폰트크기 변경      
[경영권 위협받는 재계] 배임죄 폐지 왜 나왔나

성립요건 등 지나치게 추상적

사법 리스크 대응하기 어려워

빠른 판단 막아 경영 실기 초래


[대한경제=이승윤 기자] 정부가 이사의 충실의무 대상을 회사에서 주주까지 확대하기 위한 상법 개정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이 ‘배임죄 폐지’를 거론한 이후 관련 논쟁에 불이 붙고 있다.

기업의 경영상 판단에는 항상 위험이 따를 수밖에 없을 뿐만 아니라 경영진의 신중한 판단에도 불구하고 예상치 못한 손해가 발생할 수도 있는데, 그 판단이 틀렸다는 이유로 처벌하면 결국 기업 활동이 위축될 수밖에 없다는 게 배임죄 폐지론의 골자다.

반면 배임죄를 기업 경영진의 전횡을 막는 장치로 보고 있는 우리 국민 정서상 ‘배임죄 폐지는 시기상조’라는 반론도 만만치 않아 앞으로 논의의 향방이 주목된다.



이번 상법 개정 추진 배경에는 ‘기업 밸류업(가치 제고)’이 있다. 이는 기업이 이사회를 ‘거수기’로 앞세워 소액주주보다는 대주주에게 유리한 판단을 하다 보니 이른바 ‘코리아 디스카운트(한국 주식 저평가)’가 발생한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앞서 윤석열 대통령이 올해 초 한국거래소 증권ㆍ파생상품시장 개장식에서 “이사회가 의사결정 과정에서 소액주주의 이익을 책임 있게 반영해야 한다”고 밝힌 이후 상법 개정은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다. 정부는 이달 중 의견 수렴을 거쳐 올 하반기 상법 개정에 착수한다는 방침이다.

상법 개정의 핵심은 ‘이사는 법령과 정관의 규정에 따라 회사를 위해 그 직무를 충실하게 수행해야 한다’(제382조의3)는 현행 규정에 ‘주주’를 추가하는 것이다. 이미 국회에는 이사의 충실의무 대상에 ‘총주주’(박주민 의원안)나 ‘주주의 비례적 이익’(정준호 의원안)을 추가하는 내용의 법안이 발의돼 있다.

이 과정에서 재계가 ‘선진국에는 없는 과도한 규제’라며 반발하자 정부가 ‘당근책’으로 배임죄 폐지 카드를 꺼내든 셈이다. 이 원장은 최근 브리핑에서 “우리나라는 배임죄에 대한 형사 처벌 수위가 너무 높다”며 “삼라만상을 모두 처벌 대상으로 삼는 배임죄를 유지할지, 폐지할지 정해야 한다면 폐지하는 쪽이 낫다”고 언급했다.

하지만 상법 규정에 ‘주주’라는 단어가 들어간다고 해서 별다른 효과를 기대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주주 간의 이해가 충돌했을 때 소송 남발 등 역효과만 불러올 수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최준선 성균관대 로스쿨 명예교수는 “모든 주주를 만족시킬 수 있는 경영이란 애당초 불가능하다”며 “새로운 규제만 늘릴 뿐 옥상옥이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게다가 이 같은 규제가 배임죄 처벌과 결합하면 경제 발전에 훨씬 큰 걸림돌이 될 것이란 우려도 나온다.

우리 형법 제355조 2항은 ‘타인의 사무를 처리하는 자가 그 임무에 위배하는 행위로써 재산상의 이익을 취득하거나 제3자로 하여금 이를 취득하게 하여 본인에게 손해를 가한 경우’ 배임죄로 처벌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다시 말해 기업 경영진이 일신상의 이익을 얻기 위해 고의로 회사에 손해를 입히면 처벌하겠다는 뜻이다.

여기에 형법상 업무상 배임죄(제356조)와 상법상 특별배임죄(제622조), 특정경제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특정경제범죄법)상 배임죄ㆍ업무상 배임죄 처벌 규정도 있다. 특정경제범죄법상 배임 금액이 5억~50억원 미만이면 3년 이상의 징역형, 50억원 이상이면 무기징역이나 5년 이상의 징역형으로 처벌된다. 이는 실질적인 사형 폐지국가로 분류되는 우리나라에서 살인죄와 같은 처벌 수준이다.

배임죄의 성립요건이 지나치게 추상적으로 규정돼 있을 뿐만 아니라 경영진의 고의성을 입증하기 어렵다는 점도 문제로 지적돼 왔다. 구성요건이 명확하다면 기업이 비교적 수월하게 사법 리스크에 대비할 수 있겠지만, 어디까지가 배임죄에 해당되는지 명확치 않아 기업 수사 전문가들조차 판단이 어려운 경우가 많다고 입을 모을 정도다.

검사장을 지낸 A변호사는 “검찰 등 수사기관이 배임죄를 적극 적용하다 보니 다른 형사범죄에 비해 불기소율도 높을 뿐만 아니라 무죄율도 높은 실정”이라고 전했다. 지난해 사법연감에 따르면 2022년 1심 처리 사건을 기준으로 횡령ㆍ배임죄의 무죄율은 5.8%로, 전체 형사사건의 무죄율(3.4%)에 비해 1.7배가량 높았다.

이와 함께 법원이 ‘미필적 고의’까지 인정해 배임죄를 처벌하다 보니 처벌 범위가 너무 넓다는 점도 문제다. 미필적 고의란 자신의 행위로 인해 범죄 결과가 일어날 수 있음을 알면서도 그렇게 행동하는 심리 상태를 말한다.

뿐만 아니라 대법원 판례의 상당수는 ‘손해가 발생할 수 있다’는 위험성만 있어도 배임죄가 성립한다고 보고 있다. 기업들이 회사 성장 등을 위해 빠른 경영 판단이 필요하더라도 배임죄 이슈 때문에 주저하는 경우가 많은 이유다.

이 때문에 재계 안팎에서는 오래 전부터 ‘배임죄 자체를 폐지해야 한다’는 주장이 이어져왔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기업의 경영 판단이 적절했는지 여부는 원칙적으로 시장과 주주들이 평가할 문제이지, 기업의 경영 판단에 대해 국가권력이 형사적으로 개입하는 것은 최대한 자제해야 한다는 것이다.

당장 배임죄 폐지가 어렵다면 적용 범위와 처벌 수위를 조정하자는 목소리도 높다. 최 교수는 “배임죄 자체를 폐지하기 어렵다면 최소한 특정경제범죄법상 배임죄ㆍ업무상 배임죄 처벌 규정은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일각에서는 기업 경영 판단에 대해 배임죄 적용 대신 미국처럼 경영진에 대한 민사상 손해배상 책임을 부과하는 방식 등으로 전환이 필요하다는 주장도 나온다.

회사에 이익을 가져다줄 것으로 믿고 성실하게 경영 판단을 했다면 결과적으로 회사에 손실이 발생했더라도 책임을 면제해 주는 ‘경영 판단의 원칙’ 도입이 필요하다는 주장도 설득력을 얻고 있다. 상법 개정을 통해 ‘경영 판단 행위일 경우 배임죄로 처벌하지 않는다’는 규정을 명문화하고 이를 형법상 배임죄 등에도 유추 적용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최 교수는 “경영 판단 절차를 제대로, 모두 지켰다면 회사의 손해 발생 등 결과에 다소 문제가 있더라도 면책되도록 하는 ‘미국식’ 경영 판단의 원칙이 상법 개정을 통해 도입돼야 한다”고 제안했다.

우리 법원은 대법원 판례에 따라 경영상의 판단에 이르게 된 경위와 동기, 판단 대상인 사업 내용, 기업이 처한 경제적 상황, 손실 발생ㆍ이익 획득의 개연성 등 모든 사실관계를 들여다보고 배임죄 처벌 여부를 결정한다. 반면 미국의 경우 기업이 경영 판단 과정에서 정해진 절차를 제대로 지켰다면 배임죄로 처벌하지 않는다는 게 최 교수의 설명이다.

다만 그는 “이사의 충실의무 대상 확대와 배임죄 폐지, 경영 판단의 원칙 도입을 맞바꾸는 식으로 법을 개정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이승윤 기자 leesy@

〈ⓒ 대한경제신문(www.dnews.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관련기사
프로필 이미지
정치사회부
이승윤 기자
leesy@dnews.co.kr
▶ 구글 플레이스토어에서 '대한경제i' 앱을 다운받으시면
     - 종이신문을 스마트폰과 PC로보실 수 있습니다.
     - 명품 컨텐츠가 '내손안에' 대한경제i
법률라운지
사회
로딩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