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경제=신보훈 기자]인공지능(AI), 반도체, 전기차, 블록체인 등 미래 핵심 먹거리로 평가받는 산업 대부분은 막대한 전력공급을 요구한다. 안정적인 전력 생태계는 이제 국가 첨단산업의 경쟁력을 좌우할 최전방 인프라로 부상했다.
지속가능한 성장을 담보하는 에너지 믹스도 필요하지만, 이는 급증하는 전력수요를 감당할 수 있는 전력공급 능력이 뒷받침된 후의 이야기다. 정치적 논리로 에너지 정책을 손바닥 뒤집듯 바꾸거나, 특히 전력공급 능력을 인위적으로 깎아내리는 우를 다시 범해선 안 된다.
차기 정부에선 원전을 포함한 에너지 정책을 어떻게 가져가야 할지 전문가들의 고견을 풀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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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 한슬애 기자 |
- 첨단산업 발달로 전력공급의 중요성이 커지면서 원전이 글로벌 에너지 정책의 중심축로 자리 잡은 모습이다.
윤종일=전 세계적으로 제3의 원전 르네상스가 시작됐다. AI 등 첨단산업 발달로 전력수급이 중요해지고, 에너지 안보 측면에서 원전이 다시 주목받고 있다. 탄소중립은 RE100(재생에너지 100% 충당)만으로 달성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구글ㆍ마이크로소프트 등 글로벌 빅테크들도 인지하고 있다.
정범진=데이터센터를 예로 들어보자. 데이터센터는 값싼 전기가 무엇보다 중요한데, 생산단가가 높은 재생에너지로 전력을 충당한다는 건 앞뒤가 맞지 않는다. 재생에너지로는 데이터센터에 전력을 공급하지 못한다는 보고서가 미국 에너지부(DOE)에서도 나왔다.
노백식=전력수요가 예상보다 훨씬 더 빠르게 늘고 있다. 세계 각국은 대안으로 원전 확대 정책을 선택하는 중이다. 여기에 원전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수행하려면 한국과 협력해야 한다는 인식이 확대되고 있다. K-원전의 수출 기회가 많아지는 셈이다. 원전을 반도체, 방산, 자동차 등과 같은 핵심 수출산업으로 분류ㆍ육성하고, 관련기업에 금융 및 해외 진출 지원을 확대해야 한다.
- 신한울3ㆍ4호기 착공, 체코 원전 우선협상대상자 선정 등 국내 원전산업계도 과거 탈원전의 그늘에서 벗어나고 있다.
노백식=일감이 증가하니 어느 정도 회복세로 돌아섰다. 그러나 본궤도에 진입했다고 보긴 어렵다. 원전은 일반적인 사업과 달리 진입장벽이 높고, 기술력 및 첨단 장비를 유지하기 위한 고정비가 많다. 미래 비전이 있다고 하면 기업들도 기꺼이 투자하겠지만, 반대의 경우 저조할 수밖에 없다.
박수진=걱정은 국내 정치 상황이다. 체코만 해도 한국에서 원전 산업을 어떻게 바라보고, 어떤 정책을 펴는지 예의주시하고 있다. 경쟁업체인 EDF(프랑스전력공사)는 한국의 불안한 정국을 트집 잡아 원전 건설 업무를 수행하지 못할 거라는 여론몰이를 한다. 원전은 한번 건설하면 60년 이상 가는 프로젝트라 중장기적인 안정성이 중요하다. 원전 산업에 대한 정부의 방향성은 해외 수주전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 현시점에서 탈원전 정책으로 회귀한다면 어떤 파장이 예상되나.
윤종일=미국을 포함한 전 세계가 원전 산업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있다. 이 시기를 놓치면 원전 기술력과 공급망, 핵심 인력풀이 회복하기 어려울 정도로 후퇴할 거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은 관세전쟁까지 벌이며 자국으로 기업을 유치하고 있다. 탈원전으로 전기요금이 비싸지면 우리 기업들이 해외로 생산기지를 옮길 수밖에 없는 또 하나의 원인을 제공할 거다.
정범진=문재인 대통령이 물려받은 대한민국은 부자였지만, 차기 정부의 대한민국은 그렇지 못하다. 한국전력만 해도 빚이 200조원이 넘는다. 이제는 많은 국민이 원전의 중요성을 알고 있고, 탈원전으로 인한 전기요금 폭등도 받아들이지 못한다. 이번에 어느 정부가 들어서든 섣불리 탈원전 정책을 펼치기엔 어려울 것으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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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너지 분야의 중요성은 커지는데, 정치권 이해도가 떨어지는 느낌도 있다.
조홍종=정치인들은 원전이냐 재생에너지냐만 놓고 싸우는 느낌이다. 발전원 중에는 액화천연가스(LNG) 발전소 같은 유연성 전원도 있고, 전기 외에 열에너지도 있다. 전력계통과 송전망 포화에 대한 현실적 대안, 감당할 수 있는 전기료 인상 범위 설정 등 문제들이 산적해 있다. 국내에선 최근 스페인 대정전 사태와 에너지 요금이 급등한 독일의 경제 상황을 보고도 위기감이 없다. 정치 지도자들이 진정성을 갖고 에너지 분야를 공부해야 한다.
박수진=원전과 신재생에너지를 서로 대척점으로 보는 것은 굉장히 잘못된 생각이다. 미국에선 원전을 석탄의 대체 에너지원으로 보고 있다. 잘못된 프레임에서 벗어나야 한다. 부족한 전력망까지 고려하면 소형모듈형원전(SMR)이 해결책이 될 수 있다. 원전이 유일한 대안이 아닐 수는 있지만, 과거처럼 혐오의 대상으로 봐선 안 된다. 불이 위험하지만 전 인류가 잘 활용하고 있지 않나.
- 차기 정부를 위해 정책 제언을 한다면.
정동욱=최근 미국으로부터 LNG 수입 압력을 받고 있는데, 한국이 미국에 팔 수 있는 유일한 에너지원은 원전이다. 트럼프 정부에서 원전 300기를 짓겠다고 발표했는데, 우리도 이 기회를 활용하는 담대한 계획을 세워야 한다. 미국의 현지 원전산업 생태계는 완전히 붕괴했다. 미국이 한국의 조선산업에 의존하는 것처럼, K-원전의 시공력과 공급망을 내세워 어필해야 한다.
조홍종=NDC(국가온실가스감축목표)와 탄소중립 로드맵부터 바꿔야 한다. 비현실적인 목표를 설정하고, 그에 맞춰 에너지 정책을 짜면 현실적인 대안을 마련할 수 없다. 기후 중심의 정책을 에너지 중심으로 재설정해야 하다. 에너지 전문가로 구성된 독립적 규제위원회도 설치할 필요가 있다.
박수진=에너지 정책은 과학이다. 정치적이 아닌 과학적 근거를 갖고 접근해야 한다. 에너지 믹스를 설정하는 과정에 최소 30년, 길게는 백년대계를 고려해야 한다.
신보훈 기자 bb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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