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5주년 제헌절… 법제처 역할과 과제
헌법정신 따라 실질적 법치주의 확립
각 부처가 마련한 법률안 이견 조정
최종 심의 ‘정부입법의 컨트롤타워’
하반기 국정과제 법안 200여건
조속한 통과 위해 최선 다할 것
규제샌드박스 6개 법률 개정안도
승인 절차 과감하게 간소화 도입
[대한경제=이승윤 기자] “법제처장으로서 ‘공정’과 ‘상식’이라는 이념에 따라 헌법을 먼저 생각하면서 국민 개개인이 ‘실질적 법치주의’를 피부로 체감할 수 있도록 노력하다 보니 어느새 취임한지 1년이 훌쩍 지났네요.”
이완규 법제처장이 제헌절을 닷새 앞둔 지난 12일 정부서울청사에서 <대한경제>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이승윤 기자 leesy@ |
이완규(62ㆍ사법연수원 23기) 법제처장은 17일 제75주년 제헌절을 앞두고 <대한경제>와의 인터뷰에서 “법제처는 법령 심사ㆍ해석ㆍ정비 등 모든 업무에 있어 항상 헌법정신에 부합하는 방향인가를 고려해 실질적 법치주의를 확립해나가는 것을 최우선 목표로 삼고 있다”며 이같이 밝혔다.
앞서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1월 업무보고 당시 법무부와 공정거래위원회, 법제처 등 세 기관을 가리켜 “그야말로 우리 대한민국이 지향하는 가치, 헌법을 수호하는 기관”이라고 말한 바 있다. 법제처 역시 입법 과정에서 우리 헌법정신을 담아 법을 해석하고, 법 규정을 만드는 기관으로서 헌법을 수호하는 역할을 담당한다는 것이다.
이 처장도 법제처의 주요 기능 중 하나로 위헌적인 법률이 시행되지 않도록 하는 역할을 꼽았다. 법제처는 각 부처가 마련한 법률안을 국무회의에 올리기 전 최종 심의하는 ‘정부입법의 컨트롤 타워’ 역할을 맡고 있다. 매년 정부가 국회에 제출하는 법률안을 총괄ㆍ조정하는 정부입법계획도 법제처가 수립한다.
그는 윤 대통령이 강조해 온 헌법정신에 대해 “결국 헌법 이념이 좀 더 충실하게 구현되는 나라를 만들자는 취지”라며 “이에 따라 입법부든, 행정부든, 사법부든 헌법정신에 입각해 어떤 행위를 할 때는 헌법에 부합하는지를 항상 점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인천 송도고와 서울대 법대를 졸업한 이 처장은 1990년 제32회 사법시험에 합격한 뒤 1994년 서울지검 검사로 임관해 검사 생활을 시작했다. 2003년 고(故) 노무현 대통령이 주재한 ‘검사와의 대화’에서는 참여정부의 검찰 인사를 비판해 주목받았다.
윤석열 대통령과는 서울대 법대 79학번 동기이자 사법연수원 23기 동기로, 함께 검찰에서 일하는 등 절친한 사이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문재인 정부 출범 직후인 2017년 5월 윤 대통령이 서울중앙지검장에 전격 발탁되자 ‘법무부 장관이 공석인데 장관의 제청 없는 대통령의 중앙지검장 임명은 절차적 문제가 있다’고 비판하며 검찰을 떠났다.
이후 윤 대통령이 검찰총장 시절 법무부로부터 징계를 당하자 징계 취소소송 대리인으로 나서는 등 ‘소신주의자’로서의 면모를 보여줬다는 평가를 받는다. 현 정부 출범 직후인 지난해 5월 법제처장에 임명됐다.
다음은 이 처장과의 일문일답.
헌법정신이란 무엇인가.
윤 대통령은 선거 때부터 공정과 상식을 강조해 왔다. 그렇다면 공정이나 상식은 어디서 찾아야 할까. 그게 바로 헌법이다. 헌법은 민주주의의 본질과 관련돼 있기 때문이다.
헌법이라는 법률 자체가 포괄적이어서 해석의 폭이 넓다 보니 헌법정신을 한마디로 규정하기는 어렵다. 다만 우리 헌법은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와 국민의 기본권을 보장하는 한편, 이를 위해 국가권력을 입법ㆍ행정ㆍ사법으로 나눠 상호 견제하고 균형을 이루도록 하고 있다. 이 같은 헌법원리와 이념을 ‘헌법정신’이라 할 수 있고, 이를 현실화하는 것이 ‘실질적 법치주의’라고 생각한다.
실질적 법치주의의 의미는.
단순히 법률에 규정됐기 때문에 지켜야 하는 게 아니라 기본적으로 헌법에 맞느냐에서 출발해 헌법원리를 몸에 익히고 이를 실현하는 법치주의가 돼야 한다는 것이다.
민주주의는 다수결이 기본 원리다. 국민들이 주권을 행사할 때 전원일치로 합의를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다수결을 너무 앞세우다보니 일시적으로 다수를 차지한 사람들이 소수의 이익을 전혀 생각하지 않거나 전체 국민의 이익에는 반하는 행위를 하는 부작용도 나타났다.
그래서 단순 다수결로는 국민의 기본권이 제대로 보장되는 나라를 만들기 어렵다고 판단해 이론적으로 도입한 게 헌법적 법치주의다. 국민 전체의 의사를 모아 국민들이 바라는 이념은 물론, 국가 운영을 위한 조직의 기본 틀까지 헌법에 담아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가 민주공화국으로서 작동될 수 있는 장치들은 이미 현행 헌법에 마련돼 있다. 지금처럼 정부와 국회가 부딪힐 때 해결하는 방법도 모두 헌법에 들어 있다.
결국 헌법 조문에 담겨 있는 정신이 잘 구현되도록 만드는 게 지금 당장 우리에게 필요한 헌법적 법치주의 실현을 위한 과제다. 쉽게 말해, 현행 헌법에 이미 모든 게 담겨 있으니 지금 있는 헌법 조문이라도 충실히 지키자는 뜻이다. 개헌은 그다음 문제다.
특히 정부와 국회 다수당의 정책 방향이 서로 다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정부의 잘못이 있다면 국회가 지적하고 시정할 수는 있지만, 국회의 다수당이 생각하는 정책이나 비전을 법률로 만들어서 강요하면 안 된다. 내가 보기엔 권력 분립에 반할 뿐만 아니라, 입법부가 할 일은 아닌 것 같다.
법제처의 헌법 관련 역할ㆍ기능은.
법제처는 정부에서 제출하는 법률안뿐만 아니라 대통령령이나 부령 등 모든 행정입법을 심사하는 과정에서 법령이 헌법에 반하는지 여부를 최종적으로 검토하게 된다. 흔히 정부 부처 가운데 법률과 관련된 업무를 하는 곳은 법무부만 생각하기 쉬운데, 법령 심사나 헌법적 정합성 등의 측면에서는 법제처가 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모든 정부 부처의 법령안이 법제처를 거쳐 가는 만큼 ‘게이트 키퍼’ 역할을 맡는 셈이다.
정부입법 과정에서도 부처 간에 이견이 있으면 법안 제출 자체가 어려운데, 이때 법제처가 조정 역할을 맡게 된다. 정부입법정책협의회를 열거나 그전에 나름대로 중재안을 통해 조정하는 경우도 있다.
게다가 정부입법보다 의원입법이 압도적으로 많은 상황에서 법제처는 의원입법안을 모두 모니터링하면서 위헌성 문제가 있다면 상임위 심사 단계에서 소관 부처가 정부 의견을 제출할 때 참고할 수 있도록 알려주는 역할도 맡고 있다. 의원입법안에 대한 신속한 검토ㆍ지원은 물론, 의원입법과 관련해 범정부적인 총괄ㆍ조정 기능을 강화하기 위해 지난해 말 ‘법제조정정책관’도 신설했다. 국회에서 제ㆍ개정되는 법률이 헌법적 정합성을 갖출 수 있도록 법제처가 많은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지금까지 중점 추진 업무ㆍ정책은.
이른바 ‘만(滿) 나이 통일법’ 시행이다. 태어난 해를 ‘0살’로 하고 출생일로부터 1년이 지날 때마다 한 살씩 더하는 만 나이가 이제 우리나라의 공식적인 나이 계산ㆍ표시법으로 명문화됐다. 올 상반기에도 법 시행을 앞두고 국민들이 만 나이를 혼동 없이 쉽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알리기 위한 홍보 작업에 중점을 뒀다.
코로나19와 경기 침체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청년・소상공인의 구직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학력이나 자격증을 취득하기 전의 경력도 실무경력으로 인정하는 내용의 60개 법령 일괄정비도 마쳤다. 일반적으로는 대학 등을 졸업한 다음에 실무경력을 쌓게 되지만, 가정 형편 등으로 취업을 먼저 한 뒤 ‘주경야독’을 거쳐 나중에 학위를 취득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소상공인이 일률적으로 과중한 제재처분을 받아 어려운 상황에 놓이는 결과를 방지하기 위해 고의ㆍ중과실이 없는 소상공인의 위반행위에 대해서는 과태료를 경감해주거나 행정처분을 유예하는 등 제재처분을 완화하는 내용으로 109개 법령에 대한 정비를 끝냈다.
아울러 국정과제인 ‘지방시대 실현’을 위해 지방사무에 관한 사항을 법령에서 조례로 대폭 위임하기 위해 23개 법률, 16개 대통령령에 대한 일괄개정안을 입법예고했다. 여기에 지방사무에 대한 중앙정부의 관여를 최소화하기 위해 중앙행정기관장의 사전 승인ㆍ협의ㆍ보고 규정을 사후 통보 방식으로 바꾸기 위한 200여개 과제를 발굴하는 등 법령 정비를 추진하고 있다. 지자체의 자치입법 역량을 강화하기 위해 지자체가 주도적으로 조례를 제ㆍ개정할 수 있도록 ‘입법 컨설팅’을 제공하는 등 종합적ㆍ체계적으로 입안 지원도 실시하고 있다.
만 나이 통일법의 기대 효과와 보완책은.
‘만 나이’는 태어난 날을 기준으로 개인이 실제 살아온 시간을 반영하는 합리적인 나이 계산법이다. 이제 만 나이 사용 원칙이 명확하게 확립됐기 때문에 더 이상 나이 기준을 헷갈릴 필요가 없다. 법령은 물론, 각종 계약서에 기재된 나이도 특별한 규정이 없으면 만 나이로 해석하면 된다. 일상생활에서도 나이에 관한 사회적 인식을 전환하고 권위주의적인 문화를 없애는 데도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다만 오랫동안 이어져 온 관행과 문화를 바꾸는 일인 만큼, 만 나이가 일상에 완전히 정착하려면 다소 시간이 필요하다고 보고 있다. 연금 수급시기ㆍ정년 기준 등 이미 만 나이를 기준으로 운영 중인 정책ㆍ제도나 취학연령, 술ㆍ담배 구입연령, 공무원 임용요건, 병역의무와 관련된 사항은 바뀌지 않는다는 점을 다양한 방법을 통해 홍보하고 있다. 취학연령이나 군 입대 등은 정책적으로 기존처럼 1년 단위로 관리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만 나이 예외규정에 대한 정비도 추진하고 있다. 청소년 대상 성범죄ㆍ성매매 처벌 특례 및 피해자 구제ㆍ지원 범위를 확대하고 미성년자 보호를 강화하기 위한 청소년성보호법 개정안 등 6개 법안은 지난달 이미 국회에 발의됐다. 나머지 부분은 현재 진행 중인 연구용역과 국민 의견조사 결과를 토대로 연내에 추가 정비를 추진할 계획이다.
올 하반기 중점 추진 과제는.
정부입법 총괄기관으로서 국정과제 법안의 신속한 국회 제출을 위해 소관부처에 대한 ‘원스톱 입법 지원’을 실시한다. 국회에 제출돼 있는 국정과제 법안 200여건에 대해서는 부처 간 이견을 적극 조정하고, 소관부처의 국회 심의를 지원하는 등 법안의 조속한 통과를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
법제처 자체적으로 추진 중인 △소상공인ㆍ자영업자 경영 부담 완화 △만 나이로 법적ㆍ사회적 기준 통일 △청년 경제활동 촉진을 위한 법ㆍ제도 발굴 개선 △지방자치단체의 자치입법권 강화 등의 이행도 차질 없이 추진해 가시적인 성과를 낼 계획이다.
특히 행정청의 처분 취소ㆍ철회에 따른 손실보상 제도를 도입하는 등 국민의 권리 보호를 강화하기 위한 행정기본법 개정안도 올해 안에 국회에 제출할 예정이다.
기업 규제 개선을 위해 추진 중인 과제는.
법제처는 정책 부서가 아니다 보니 경제 정책이나 수출 활성화, 기업 투자 촉진 등을 직접 지원하는 과제를 추진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신산업 발전을 촉진하고 각종 규제로 인한 기업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 규제를 완화하기 위한 법령 정비를 추진하고 있다.
먼저 행정규제기본법에 따른 네거티브 규제(법률로 금지한 행위가 아니면 모두 허용하는 규제) 전환을 산업 전반으로 확대하기 위한 9개 법령 정비를 올 상반기에 마쳤다.
특히 기업이 새로운 기술이나 서비스를 내놓을 수 있도록 일정 조건에서 규제를 적용하지 않는 규제혁신 플랫폼인 ‘규제샌드박스’ 관련 6개 법률 개정안을 최근 국회에 제출했다. 종전에 규제샌드박스 승인을 받은 신제품이나 서비스와 내용ㆍ방식ㆍ형태 등이 동일하거나 비슷한 경우에는 승인 절차를 과감하게 간소화하는 등 패스트트랙(신속처리 절차)을 도입하는 내용이 골자로, 승인 기간이 기존 평균 4∼5개월에서 2개월로 대폭 줄어들 것으로 기대된다.
아울러 스마트 주차로봇이나 무인순찰 등 새로운 기술이 시장에 빠르게 안착할 수 있도록 관련 법령 정비도 지원하고 있다.
이승윤 기자 lees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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