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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수첩] 운전대를 잡는 시간 ‘7시간4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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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25-05-22 06:00:52   폰트크기 변경      

7시간47분. 서울시버스운송사업조합이 지난 20일 꺼내 든 숫자다. 시내버스 기사들이 하루 평균 이 정도만 운전한다는 것이다. 이 수치를 근거로 “그렇게 일하고도 평균 연봉이 6200만원”이라며, 통상임금까지 반영하면 시민 부담이 최대 2800억원까지 늘어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 주장에는 빠트린 게 있다. ‘노동의 실상’을 간과했거나 일부러 지운 것이다. 운전대를 잡는 시간만 노동시간으로 볼 수 있을까. 기사들은 하루 15시간 가까이 차고지에 묶여 있다. 새벽 3시에 출근해 밤 11시에 퇴근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 긴 대기시간은 ‘쉬는 시간’으로 처리되지만, 외출도, 온전한 휴식도 보장되지 않는다. “일은 적게 하고 돈은 많이 받는다”라는 지적이 100% 맞는 말이 될 수 없는 이유다.

서울시는 “우리는 교섭 당사자가 아니다”라고 반복한다. 그러나 노선과 요금, 예산 편성까지 모두 시가 결정하는 준공영제 체제에서 서울시가 완전히 손을 뗄 수 있을까. 실제로 매년 9000억원 넘는 보조금이 투입되고, 법원도 “지자체는 사실상 사용자”라고 판단한다. 그럼에도 서울시는 “사측이 알아서 할 일”이라며 뒷짐을 지고 있다.

이번 갈등의 뿌리는 단순한 임금 인상이 아니다. 왜곡된 임금 구조다. 기본급은 낮추고, 정기상여금과 각종 수당으로 ‘총액’을 맞추는 방식. 사용자 측은 2개월마다 고정 지급되는 상여금을 통상임금에서 제외하려고 기본급을 인위적으로 낮춰왔다. 기본급이 낮으면 연장ㆍ야간근로 수당도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관행에 반발해 2015년 서울 동아운수 노동자들이 소송을 제기했다. 1심은 패소했지만, 2020년 세아베스틸, 지난해 한화생명 사건 등에서 법원은 정기상여금의 통상임금 포함을 인정했다. 다만, 대법원이 소급 지급을 인정하지 않았고, 노조들은 ‘구조 개편+소급 포기’라는 절충안을 선택했다.

하지만 버스노조는 “미지급 수당은 단순한 채무가 아니라 노동의 대가”라는 입장을 고수한다. 이번 교섭에서 대법 판결의 소급 적용을 요구하지 않았지만, 수당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임금 체계는 바꿔야 한다는 입장이다. 수당을 채우려면 장시간 운전을 해야 하고 피로가 쌓이면 시민 안전에도 위협이 된다. 시민의 안전을 책임지는 노동은 그에 걸맞은 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서울시의 버스 시스템은 ‘준공영제’라는 이름 아래 공공서비스를 수행하고 있다. 하지만 행정 주체인 서울시는 막상 갈등이 불거질 때마다 뒤로 빠진다. 협상 테이블 옆에는 없고, 여론전 무대의 뒤에 선다.

버스가 멈추면 도시도 멈춘다. 서울시는 더 이상 관전자일 수 없다. 뒷짐 진 채 위기를 넘기려는 시간은 끝났다. 시민의 발이 멈추기 전에 서울시가 먼저 움직여야 한다.


박호수 기자 lake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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