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운대와 인수봉 사이 암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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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의 노스페이스, 숨은 벽. 뒤로 인수봉과 백운대가 보인다. |
“새로운 코스 좀 없어?”
겨울의 냉기와 봄의 온기가 공존하는 3월의 마지막 주말. 북한산을 좀 다니는 사람도 잘 모르는 ‘숨은벽’ 코스를 다녀왔다. 마침 북한산의 생소한 코스를 찾는 지인이 있어 길동무로 함께했다.
숨은벽은 백운대와 인수봉 사이 이른바 노스페이스, 즉 북면 쪽의 암벽을 말하는데 두 봉우리 사이에 가려 숨어 있는듯하다는 의미로 붙여진 이름이란다. 북쪽에서 일정 정도 올라가면 갑자기 훅 나타나는데 인수봉, 백운대의 북면과 함께 펼쳐지는 모습은 북한산의 절경 가운데 하나로 꼽을만하다.
숨은벽은 우리가 잘 아는 산성입구에서 좀 더 송추쪽으로 이동해 밤골이나 사기막골에서 들머리를 잡는다. 서울에서 밤골까지는 버스 노선이 2개가 있었으나 올해부터 1개 노선이 산성입구에서 회차한다. 양주시민들도 불편을 호소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산객들도 숨은벽은 물론 노고산, 오봉산, 사패산 같은 곳도 대중교통으로 다니기 불편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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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입부 돌계단. 국립공원답게 정비가 잘 되어있다. |
이번에는 길동무의 차를 타고 산성입구에 주차 후 밤골로 이동해 숨은벽을 보고 백운대 아래 백운봉암문(위문)을 거쳐 산성입구로 돌아오기로 했다.
사실 숨은벽 코스는 백운대, 그러니까 정상으로도 갈 수 있다. 산성입구나 우이동을 들머리로 잡는 이들이 대부분이겠지만 숨은벽 코스를 통해서도 정상에 오른다. 작년 산성입구 코스가 폭우 피해로 한동안 통제됐을 때 이 코스를 이용하기도 했다.
주차 후 찻길로 내려오는데 버스 오는 것이 보였다. 열심히 뛰어 겨우 버스에 올랐다. 걸어가도 되지 않느냐며 괜히 힘 뺐다는 길동무의 볼멘소리도 있었지만 빨리 시작하고 일찍 끝내는 게 좋다는 말로 달래며 밤골로 향한다. 후술하겠지만 버스를 탄 건 신의 한 수였다.
이제 봄
버스를 내려 국사당이라는 큰 간판이 있는 오른쪽 길로 들어선다. 200∼300M 정도 걸어가면 왼쪽에 국사당이 보이는데 여기서부터 산행이 시작된다. 두 갈래 길.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
왼쪽 사기막 야영장 쪽으로 출발했다. 들머리 부분은 비교적 수월하다. 완만한 오르막길이고 산성입구에 비하면 사람도 적고 한산해 편안한 느낌의 오솔길이다. 백운대 우측이라는 화살표가 보인다. 방향을 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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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 초입에서 만난 진달래 |
10분쯤 걸었을까? 군데군데 분홍색 점이 보인다. 진달래다. 아직 차지만 세상과의 약속을 지키려 망울을 틔운 것 같았다. 꽃잎을 열려고 애써 안간힘을 쓴 듯했다. 봄은 봄인가 보다.
진달래의 인사를 뒤로하고 산행을 계속한다. 슬슬 경사가 급해진다. 길도 거칠어진다. 소위 말하는 ‘등린이’라면 힘들어할 만한 정도의 산행이 시작된다.
시야가 트여 둘러보니 저 멀리 가지런히 놓인 오봉과 도봉산이 눈에 들어온다. 뒤쪽으로는 노고산이 넓적하게 놓여 있다. 경사가 더욱 심해진다. 걸음은 느려지고 호흡은 빨라진다. 백운대와 장군봉 북면의 일부가 살짝 보이기 시작한다. 이제 조금만 더 가면 절경이 터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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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은벽 직전. 영장봉 왼쪽으로 도봉산과 오봉이 보인다. |
10분쯤 걸었을까? ‘짜∼잔’하고 숨은벽이 웅장한 모습으로 눈앞에 펼쳐졌다. 숨은벽 코스의 하이라이트인 마당바위에 도착한 것이다. 역시 언제 봐도 숨 막히는 비주얼이다.
왼쪽 인수봉, 숨은벽, 백운대, 사자봉, 장군봉까지 이어지는 스카이라인부터 그 봉우리들을 지탱하고 있는 웅장한 암벽, 조각칼로 세밀하게 깎아낸 듯한 바위, 군데군데 자라고 있는 나무들이 서로서로 뽐내고 있지만 하나의 오케스트라처럼 가득 어우러져 있다.
역시 북한산은 명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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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운대와 인수봉 사이의 숨은벽. |
숨은벽 코스는 대체로 한산해 다른 산객들을 만나기 쉽지 않다. 하지만 마당바위에서는 항상 몇몇을 보게 되는데 그날도 그랬다.
우리 뒤로도 사람들이 조금씩 모여든다. 한바탕 탄식을 내고는 절경을 담느라 다들 분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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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은벽 조망 포인트, 마당바위. |
다시 겨울?
약간의 눈발도 있었고 날씨가 심상치 않다. 아쉽지만 길을 재촉하는 게 좋을 듯했다. 사기막봉 옆으로 우회하다 한동안 내려간다. 겁나는 구간도 좀 있다.
이제 너덜길 구간. 인수봉과 백운대 중간 고개로 올라가는 길이 만만치 않다. 길도 호흡도 거칠어진다. 거기에 날씨까지 심술을 부린다. 눈발이 날리는가 싶더니 제대로 내리기 시작한다. 이런, 쌓이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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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막봉을 우회하고 내려가는 길. 살짝 아찔하다. |
한 20분 정도 올라갔을까. 나무 계단이 보인다. 이제 거의 다 올라왔다는 이야기다.
눈은 점점 더 많이 내린다. 겨울이 봄에게 자리를 양보하기 싫은 모양이다. 고개를 넘어 백운봉암문 앞에 도착했다. 성곽 위에도 눈이 많이 쌓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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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운동암문 옆 성곽 위에 쌓인 눈. |
여기저기 산객 무리들의 의견이 갈린다.
“백운대로 가자!”, “앞도 안 보이는데 뭐 하러 올라가? 위험하다”, “내려가서 술 마시자!”
길동무와 내려가기로 결정했다. 백운대야 자주 가니까…. 눈이 너무 많이 내려 커피는 포기하고 초콜렛과 양갱을 간단히 나눠 먹고 내려갈 채비를 한다. 스틱을 뽑고 산성입구로 향했다.
성곽 너머도 눈이 많이 쌓였다. 눈을 피한 하산객들이 몰려 줄줄이 내려간다. 아이젠을 착용한 사람도 보인다. 좀 미끄럽다. 나무 계단을 지나 너덜너덜한 돌계단 구간 진입. 한발 한발 조심스럽게 걷다 보니 너덜구간 지나 대동사가 보인다.
눈도 많이 녹아 살짝 속도를 올린다. 원효봉 갈림길을 지나 개연폭포를 지난다. 이제 보리사 대웅전의 푸른색 지붕이 보인다. 백운대 길은 끝났다는 뜻이다.
그래도 봄
북한동역사관 앞에서 간단히 정비를 하고 산성입구로 향한다. 대서문 쪽으로 가는 차로가 있고 계곡을 따라가는 길이 있는데 보통은 계곡길로 간다. 계곡 물소리에 기분이 좋아지기도 하고 대단하진 않으나 볼만한 풍경도 있기 때문이다.
산길 끝에 여기저기 개나리가 힘겹게 꽃잎을 열고 있었다. 이 또한 약속을 지키느라 애쓰는 거 같아 안쓰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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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길 끝에서 만난 개나리. |
산성입구 도착. 들머리부터 4시간. 백운대를 패스하고 온 것치곤 시간이 좀 길었다. 눈 때문에 지체된 탓이리라.
마지막으로 서두의 버스 탄 이야기. 버스를 안 타고 30∼40분 정도를 걸어 늦어졌다면 타이밍 상 눈 때문에 숨은벽의 절경을 제대로 못 볼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과적으로 좋은 선택이었다.
서툰 진달래의 마중, 여린 개나리의 배웅. 그리고 그 둘 사이 눈꽃의 심술. 어린 봄, 산에는 두 개의 계절이 공존하고 있었다. 그래도 갈 것은 가고 올 것은 온다. 봄이다.
글ㆍ사진=박종현 산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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