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경제=박재영 기자] 날이 참 좋다. 사계절이라 부르기 민망할 정도로 봄과 가을이 짧아진 탓에 이런 날이 더 귀하게 느껴진다. 어딘가 나가야만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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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국제정원박람회가 열리는 서울숲 |
서울국제정원박람회를 찾았다. 2015년부터 올해 11번째를 맞은 박람회는 서울숲을 통째로 사용하고, 성수동과 광진구 골목까지 총 167개 정원이 들어선다. 지난해 2만㎡였던 행사장 면적은 9만㎡로 4배 넘게 커졌다. 행사기간도 180일로 지금껏 가장 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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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국제정원박람회 마중정원 |
설렘을 안고 입장한 서울숲. 널찍한 길과 초록 정원은 눈을 쉬게 한다.
시작을 알리는 첫 정원은 숲의 출발선 ‘마중정원’이다. 서울숲 부지는 1989년까지 뚝섬 경마장으로 사용됐다. 입장객과 반대로 달리고 있는 기수 모형은 경마가 이 공간을 우리에게 양보하고 퇴장하고 있는 듯 보였다. 이제 서울숲은 가장 빠른 이가 승리하는 경마장에서, 가장 느린 사람도 환영받는 공원으로 변했다.
조금 더 들어가 해치 모형을 지나면 본격적으로 정원박람회가 시작된다. 언뜻 보면 다 같은 정원 같아도 저마다 전하는 의미가 남다르다. 작품을 오롯이 느끼며 관람하는 것도 좋지만, 작가의 의도를 알고 싶다면 정원마다 설치된 QR을 스캔해 해설을 들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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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좌)대우건설 기업정원 ‘써밋 사일로 정원’, (우)초청정원 ‘흐르는 숲 아래 정원’ /사진 : 서울시 제공 |
반시계방향으로 박람회를 돌 때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작품은 국제적 조경가 앙리 바바의 ‘흐르는 숲 아래 정원’이다. 곳곳에 배치된 원형 연못 정원이 관람객의 동선을 얽히게 한다. 앙리는 이질적 식재와 물, 빛, 사람의 상호작용으로 경관을 구성했다.
바로 옆에는 원형 구조를 강조한 ‘써밋 사일로 정원’이 있다. 이 정원은 대우건설이 본시구도와 협업해 선보인 기업 정원이다. 이 정원은 과거 경마장 시절 트랙의 정중앙부라는 위치적 특성을 살려 O자형 정원 바깥에서는 외부 소리를 자연스럽게 끌어들이되,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고요해지는 경험을 구성했다. 박람회 곳곳에는 건설사를 비롯해 총 32개의 기업이 조성한 정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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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가지 자재가 깔려있는 서울숲 바닥 |
각 정원은 식재만 달리하는 것이 아니라 구조물ㆍ바닥ㆍ음악 등을 활용해 정체성을 형성한다. 이동할 때 발바닥에 느껴지는 감촉도 사뭇 다르다. 자갈, 나무껍질, 잔디, 황토, 모래까지, 신발은 조금 더러워지겠지만 걷는 맛이 있다. 일률적으로 안정성만 강조한 도시의 바닥 마감재 위를 걸을 때는 느낄 수 없는 긴장감이 재미를 더한다.
공간마다 달라지는 공기도 예민하게 느껴봐야 한다. 햇볕 아래인지 그늘 아래인지, 물가 옆인지 숲 중앙인지에 따라 습도와 온도가 확연히 다르다. 공원을 거닐다 보면 스프링클러나 분수에서 날아온 물방울이 피부에 닿으면서 기분 좋은 차가움을 선물하기도 한다. 더 많은 감각을 열고 즐길수록 정원을 더 많이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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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아있는 나무 사이 심긴 산불 피해목 |
△정원으로 표현한 땅의 의미
이번 박람회의 큰 주제는 ‘서울류(流)’다. 서울시는 이번 박람회에서 서울의 자연과 문화가 담긴 ‘서울다움’을 선보인다. 각 작품이 자연의 어떤 모습을 강조하는지 살피면 정원의 의미가 드러난다.
해치 캐릭터 왼편에 있는 ‘케이뷰티 가든’은 거울 연못에 비친 목재 오두막을 구현했다. 밝은 원목 건물들 사이 검은 오두막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오두막에 들어서면 지난해 안동 산불 현장에서 가져온 산불 피해목 그루터기가 놓여 있다. 이 정원을 기준으로 잔디마당 정반대편에 위치한 국립생태원의 ‘다시 태어나는 숲’에는 불탄 나무를 다시 심어놓기도 했다.
죽은 나무를 산 나무들 사이에 심어놓은 것이 섬뜩하기도 하지만 이 서늘함이 산불 피해에 대한 경각심을 자극한다. 작가 한강이 던진 “죽은 자들이 산 자를 구할 수 있는가”는 물음이 떠오른다. 죽은 나무들이 산 나무들을 위해 그을림도 지우지 않고 사람들 앞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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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DC현대산업개발 기업정원 ‘숨 쉬는 땅’ . 이제석 소장이 직접 구조물에 올라 설명하고 있다. |
잔디마당 우측에는 유독 색이 진한 인조잔디가 눈에 들어온다. 자연을 논하는 자리에 인조잔디라니. 작품 중앙에는 버튼 두 개가 있다. ‘업(Up)’을 누르면 땅에서 케이크 조각 모양의 땅 한 조각이 솟아오른다. ‘다운(Down)’을 누르면 삼각형의 구덩이를 만든다.
바로 ‘광고천재’ 이제석 소장이 현대산업개발과 제시한 ‘숨 쉬는 땅’이다. 아무것도 없던 땅에 생명을 불어 넣는 것은 결국 사람의 손길이라는 의미를 담았다. 인공물 사용에 대한 반발도 있었지만, 조경의 해석을 달리해 관객과 땅이 소통하는 그 자체를 경관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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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국제정원박람회 피카츄 정원 |
△캐릭터 정원부터 이색 팝업까지
남녀노소 즐길 수 있는 다양한 콘텐츠도 마련돼있다. 행사 시작 후 가장 큰 반응을 이끌어낸 작품은 다름 아닌 ‘포켓몬 정원’이다. 왜 인기있는 작품을 서울숲 끝자락에 배치했느냐는 물음에 박람회 담당자는 “포켓몬 정원은 시민들이 일부러 찾아오기 때문에 오는 김에 다른 작품도 구경하시라는 의미”라고 답했다. 지난해 ‘메타몽’이 인증샷 스팟으로 인기를 끌었고, 올해는 2026 서울색 ‘모닝 엘로우’에 맞게 ‘피카츄’들이 정원을 가득 채웠다.
‘윈터 숲’이란 작품도 눈에 들어온다. 그런데 이름과 달리 겨울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자세히 보니 케이팝 그룹 에스파 멤버 윈터의 팬들이 조성한 작품이다. 그 옆에는 방탄소년단 제이홉의 팬들이 꾸민 ‘제이홉 숲’도 있다. 이곳들도 포켓몬 정원 못지않은 포토스팟이 되지 않을까 싶다.
‘팝업 성지’ 성수동답게 행사 프로그램도 독특하다. 최고의 ‘꿀잠러’를 선발하는 ‘2026 꿀잠 대회&반려견 꿀잠대회’, 펍지(PUBG)성수 팝업 정원 ‘가든안가든’, 박람회 기간 내내 진행하는 정기ㆍ특별 공연까지 매주 다른 놀거리를 제공한다. ‘반려견 꿀잠 대회’는 우리집 강아지를 출전시켜 보고 싶다.
자연은 ‘마더 네이처(Mother Nature)’라고도 불린다. 자연이 모든 존재를 보살핀다는 의미다. 서울국제정원박람회는 도시에 지친 사람들을 품어주는 자연의 회복력을 느끼기 충분한 공간이다. 많은 이들이 서울숲을 찾아 웃으며 돌아가길 바란다.
글ㆍ사진=박재영 기자 yo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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