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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급사 관리(SRM, Supplier Relationship Management)는 오랫동안 구매의 주변부 기능으로 취급받았다. 가격을 깎고, 납기를 관리하고, 품질 클레임을 처리하는 것.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공급망이 무기화되고 ESG 규제가 공급사 선택 기준을 바꾸며 그룹 통합구매가 새로운 경쟁력으로 부상하는 시대에, SRM은 전략의 핵심으로 올라섰다.
▲공급사와의 거리 : 너무 멀지도, 너무 가깝지도 않게
공급사와의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거리다. 법률 용어로 팔 하나만큼의 거리(Arm‘s Length)라는 개념이 있다. 서로 독립적으로, 각자의 이익에 따라 공정하게 거래한다는 뜻이다. 공급사와 너무 거리를 두면 위기 시 협력을 끌어낼 수 없다. 반대로 너무 가까워지면 판단이 흐려진다. 오랜 거래처 담당자와 쌓아온 친밀감이 가격 검증을 방해하고, 대안 탐색을 일종의 배신처럼 느끼게 만든다면 그 관계는 구매자의 적이 된 것이다.
진정한 파트너십은 지식(Knowledge)과 진정성(Attitude)이 만날 때 생긴다. 필자가 32년 현장에서 가장 깊은 인상을 받은 공급사들은 단순히 물건을 파는 곳이 아니었다. 자신들이 다루는 품목에 해박한 지식을 갖추고, 거시적 시장 시황을 분석적 시각으로 꿰뚫으며, 최적의 구매 타이밍에 대한 전략적 조언을 건넬 수 있는 곳이었다. 물류를 재설계하고, 베이시스(Basis) 차이를 활용하고, 공급자 금융(Supplier Financing)을 제안해 상호 금융 비용을 줄여주는 파트너를 만날 때 비즈니스의 격은 한 단계 올라간다.
반면 인적 네트워크와 영향력만을 내세우고 품목에 대한 기본 지식조차 부족한 공급사는 위기 상황에서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공급사를 가르쳐서 구매할 수는 없다. 화물이 도착하기까지 마음을 졸여야 하는 파트너와는 전략적 관계를 맺을 수 없다.
▲ESG가 바꾸는 공급사 선택의 기준
공급사 관리의 지형이 바뀌는 두 번째 이유는 ESG다. 기업의 탄소 배출 책임이 자사 공장(Scope 1ㆍ2)을 넘어 공급망 전체(Scope 3)로 확장되면서, 공급사의 환경·사회·지배구조 수준이 곧 발주 기업의 ESG 점수가 됐다.
EU의 EUDR(산림벌채규정)은 팜유ㆍ대두 공급사에게 원산지 추적을 요구한다. EU의 공급망 실사법(CSDDD, Corporate Sustainability Due Diligence Directive)은 연매출 4억5000만 유로 이상의 대형 발주 기업이 직접 및 간접 공급사의 인권ㆍ환경 리스크까지 실사하도록 의무화한다. 2025년 Omnibus I 승인으로 전면 적용 시기가 2029년 7월로 조정됐지만, 규제의 방향 자체가 바뀐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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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기업과 무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글로벌 공급망은 연결돼 있다. 유럽 브랜드에 납품하는 한국 식품·화장품 기업은 이미 공급사의 지속가능성 인증을 요구받고 있다. RSPO 인증 팜유, 비산림벌채 대두, 재생에너지 기반 화학 원료. 이 기준을 충족하는 공급사 네트워크를 지금 확보하지 못하면 2~3년 후에는 선택지가 없어진다.
ESG 기준이 공급사 선택에 개입한다는 것은 최저가 낙찰 원칙이 흔들린다는 뜻이기도 하다. 같은 품질의 팜유라도 지속가능 인증 여부에 따라 단가가 달라진다. 그 차이를 비용으로 볼 것인가, 미래 리스크를 줄이는 투자로 볼 것인가. 경영진의 인식이 구매 전략의 방향을 결정한다.
▲통합구매(Center-Led), 전략은 하나로 실행은 각자로
공급사 관리의 세 번째 변화는 그룹 통합구매다. 어느 기업에서나 이 문제는 만성적 논쟁이다. 본사 주도 전사 통합구매를 강화해야 한다는 쪽과, 사업 특성을 아는 각 계열사가 책임구매를 해야 한다는 쪽이 맞선다. 이 갈등은 한국만의 것이 아니다. 유니레버(Unilever)는 1980~90년대 분산 구조의 비효율을 겪은 뒤 2000년대 초 전사 통합 체계로 전환했고, 이후 카테고리 기반 하이브리드 구조로 진화했다. 집중과 분산 사이를 오간 것이다.
두 모델의 장단점은 명확하다. 통합구매는 전사 물량을 모아 협상 레버리지를 높이고, 카테고리(category) 전문가를 집중 육성할 수 있다. 예로 대두 전문가 한 명이 그룹 전체의 대두 구매를 10년간 담당하면 카길(Cargill), ADM 트레이더와 대등한 협상이 가능해진다. 반면 분산구매는 사업 단위의 빠른 의사결정과 스펙ㆍ납품 일정의 유연한 대응이 강점이다. 공급 리스크도 자연스럽게 분산된다. 통합구매의 가장 큰 위험은 의존도 집중이다. 단일 공급사에 그룹 전체 물량을 몰아주면 협상 초기에는 유리하지만, 그 공급사에 문제가 생기면 그룹 전체가 동시에 흔들린다.
글로벌 선진사들의 현재 답은 Center-Led(통합 구매 관리 체계) 모델이다. 완전한 집중도, 완전한 분산도 아닌 하이브리드 구조다. 애버딘 그룹(Aberdeen Group) 아던트 파트너스(Ardent Partners) 조사에 따르면 Center-Led 조직은 분산 구조보다 두 배, 완전 집중 구조보다도 약 20% 더 많은 구매 지출을 전략적으로 관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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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조는 이렇다. 중앙 구매 조직은 전략 품목의 △공급사 선정 △가격 협상 △ESG 기준 △헤징 전략을 총괄한다. 전문 인재 육성과 모범 사례(Best Practice) 공유도 중앙의 몫이다. 그러나 △품목별 스펙 △납품 일정 △수급 우선순위는 각 계열사 구매팀이 결정한다. 핵심 원칙은 ‘조율(coordinating)이지 통제(controlling)가 아니다’라는 것이다. 본사는 프레임워크를 설계하고, 계열사는 그 안에서 자율적으로 실행한다.
현직에서 그룹 통합구매를 처음 성공시킨 2020년의 경험도 이 구조에 가까웠다. 개별 계열사 협상 대비 단가 경쟁력과 공급 안정성 모두에서 의미 있는 성과를 거뒀지만, 사별 스펙 및 수급 일정 조율은 끝까지 현장의 몫이었다.
공급사는 경쟁시키되 종속되지 않아야 하고, 협력하되 의존하지 않아야 한다. 통합구매는 그 목표를 위한 수단이지 목적이 될 수 없다. 이 역설적 균형이 공급사 관리의 영원한 숙제다. 규칙이 바뀌는 시대일수록 그 숙제의 무게는 더 무거워진다.
▶다음 회 예고 ⑨ 한국 구매의 현주소
한국 제조업의 구매 위상이 글로벌 수준 대비 어디에 있는가. 구매 인재 풀의 구조적 문제와 경영진의 인식 격차, 구매 조직 설계의 방향을 짚는다.
본 기고는 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특정 기업의 공식 입장을 대표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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